정신없어도어찌어찌살아지는 신기한 인생
MBTI 검사로 본 나는 ENFJ이다. 일명 정의로운 사회운동가. 이 부류의 사람들은 사회정의구현을 위해 어려움에 맞서 싸우고 타인의 성장을 도모하고 협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유형에 나오지 않는 ENFJ의 치명적 단점은 허당이라는 것이다. 외출할 때 차키나 핸드폰 둘 중 하나는 늘 두고 다녀서 다시 집으로 가는 것은 일상다반사요, 커피를 계산하고 커피는 두고 카드만 받아오거나, 마트에 차를 갖고 가선 장 보면서 차를 갖고 간 사실을 까맣게 잊고 낑낑대며 장 본 것을 들고 걸어온다. 그러나 나와 우주 최강 찰떡궁합의 인간 겉바속촉 INFJ 남자를 만나 하루가 멀다고 펑펑 터트리고 다니는 나의 허당기 '뒤처리'를 그에게 맡기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는 딸아이가 5살이 되어 유치원에 가자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일념으로 방송대 교육학과에 편입했다. 방송대는 온라인 학습이 기본이지만 각 학기에 한번 지역대학에 가서 하는 출석수업이 있다. 출석수업은 학우들도 만나고 동영상으로만 뵙던 연예인 같은 교수님들과의 면대면 수업으로 독학의 외로움도 달래며 학창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설레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하루 종일 진행되는 출석수업 기간엔 지역 대학이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점심을 먹기가 번거로운 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출석수업 기간엔 스터디 멤버끼리 도시락을 싸오기로 했다.
그날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상추, 오이, 고추, 된장 그리고 후식까지 준비했다. 없는 솜씨로 볶고 지지며 오랜만에 도시락 싸는 내 손길은 분주했다. 그렇게 정성껏 싼 도시락을 빨간 보냉백에 넣고 시간 맞춰 등굣길에 올랐다. 설레는 학교 가는 길에 화창한 날씨, 라디오에서 흐르는 경쾌한 음악, 쏟아지는 햇살. 세상은 역시 내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집에서 운전해서 30분 정도 거리의 지역 대학에 도착했다. 날마다 주차전쟁이 벌어지는 그곳에서 현관 바로 앞에 헬리콥터도 주차할 만한 자리가 보였다. 주차까지 완벽했다. 그렇게 주차를 끝내고 뒷좌석에 있는 소중한 빨간 밥통을 꺼내고 핑크색 책가방을 찾았다. 어? 왜 없지? 아뿔싸! 그렇다. 난 밥통만 챙긴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러 학교에 왔건만 책가방은 안 갖고 오고 밥통만 챙긴 것이다.
강의실로 올라가면서 신랑한테 툴툴대며 전화를 했다.
“여보, 세상에 나 학교 오면서 도시락만 챙기고 책가방은 안 챙긴 거 있지? 미쳤나 봐!”
“어떻게 하루 종일 수업하려고?” 신랑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 스터디 친구랑 보면 돼. 걱정 마! 수고해!”
난 신랑과 쿨하게 통화를 끝내고 강의실로 향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 큰 강의실 맨 앞에, 교수님 턱 밑에 자리를 잡았다. 1교시 동안 친구와 교과서를 나눠 보느라 왼쪽 옆구리에 쥐가 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두 번째 강의가 시작되고 30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뒤쪽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어떤 남자가 내 핑크색 책가방을 갖고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그 남자는 내 남편이었다! 부끄럼쟁이 신랑은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가방만 얼른 던져 주고 황급히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교수님은 학교 오는 데 가방도 안 갖고 왔다고 놀리시고, 학우들은 깔깔대며 웃었지만 난 귀까지 빨개진 채 신랑의 엄청난 선물에 눈물이 났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마누라가 공부 못할까 봐 거기까지 와 준 신랑의 사랑이 메마른 강의실을 감동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하지만 속은 촉촉한 남편의 사랑으로 나머지 강의도 힘내서 들을 수 있었다.
요즘 코로나 19 사태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의 우정을 위해 악착같이 10시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꼴 보기 싫었는데 우리 사랑의 통장에서 ‘빨간 밥통 사건’을 꺼내 사랑이 말라버린 마음에 긴급 수혈을 해야겠다. 오늘은 신랑이 좋아하는 두부 넉넉히 넣은 얼큰한 동태탕이나 끓여야지.
사진: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