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밥통과 핑크 책가방

정신없어도어찌어찌살아지는 신기한 인생

by 수연길모

딸아이가 5살이 되어 유치원에 가자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일념으로 한국방송대학교 교육학과에 편입했다. 방송대는 온라인 학습이 기본이지만 각 학기에 한번 지역대학(또는 지정된 학교)에 가서 하는 출석 수업이 있다. 출석 수업은 학우들도 만나고 동영상으로만 만나던 연예인 같은 교수님들과의 수업으로 독학의 외로움도 달래며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한 설레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온종일 진행되는 출석 수업 기간에는 지역 대학이 외진 곳에 있어서 점심을 먹기가 번거로운 점이 있었다. 고민 끝에 이번에는 스터디 멤버끼리 도시락을 싸 오기로 했다.


출석 수업의 아침이 밝았다. 새벽같이 일어나 어젯밤 양념에 재워둔 돼지고기를 볶았다. 같이 먹을 상추, 오이, 고추도 잊지 않았다. 후식이 빠지면 섭섭하지. 단감을 한입 크기로 자르고 보온병에 달달한 믹스커피도 준비했다. 벗들과 맛있게 먹고 우아하게 커피를 마실 생각하니 피곤한 겨를도 없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정성껏 싼 도시락을 빨간 보냉백에 넣고 시간 맞춰 등굣길에 올랐다. 화창한 날씨, 라디오에서 흐르는 경쾌한 음악, 쏟아지는 햇살. 세상은 역시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집에서 운전해서 30분 정도 거리의 지역 대학에 도착했다. 날마다 주차 전쟁이 벌어지는 그곳에 탱크도 댈 수 있을 법한 현관 앞 꿀주차 자리가 비어있었다! 주차까지 완벽했다. 주차를 끝내고 뒷좌석에 있는 소중한 빨간 밥통을 꺼내고 핑크색 책가방을 찾았다. 어? 이상하다. 왜 없지? 아뿔싸! 그렇다. 난 밥통만 챙긴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러 학교에 왔건만 책가방은 안 갖고 오고 밥통만 챙긴 것이다.

강의실로 올라가면서 신랑한테 툴툴대며 전화를 걸었다.

“여보, 세상에 나 학교 오면서 도시락만 챙기고 책가방은 안 갖고 온 거 있지? 미쳤나 봐!”

“어떻게 온종일 수업하려고?” 신랑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 스터디 친구랑 보면 돼. 걱정하지 마! 수고해!”

신랑과 쿨하게 통화를 끝내고 강의실로 향했다. 그날 수업을 들을 강의실은 직사각형으로 길쭉한 곳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강의실 맨 앞에, 교수님 턱 밑에 자리를 잡았다. 1교시 동안 옆 자리 친구와 교과서를 나눠 보느라 왼쪽 옆구리에 쥐가 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두 번째 강의가 시작되고 30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뒤쪽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어떤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그 남자는 내 남편이었다! 신랑은 생글생글 웃으며 책가방도 없으면서 맨 앞에 앉은 마누라에게 오느라 학우들의 책상을 힘겹게 헤치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게 핑크색 가방만 얼른 던져 주고 황급히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교수님은 학교 오는 데 가방도 안 갖고 왔다고 놀리시고, 학우들은 깔깔대며 웃었지만 난 귀까지 빨개진 채 눈물이 났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마누라가 공부 못할까 봐 그 먼 곳까지 와 준 신랑의 사랑에 한동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신랑 덕분에 그 시간 세계에서, 아니 우주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되어 고된 출석 수업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뭘 물어보면 말 대신 방귀나 트림이 먼저 나오고 퇴근하면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스마트 폰과 텔레비전 리모컨을 너무나도 소중히 여기는 신랑을 보면 울화통이 터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빨간 밥통과 핑크색 가방 사건은 화의 작은 불씨를 잠재우게 한다. 오늘은 신랑이 좋아하는 두부 팍팍 넣은 돼지고기 김치찌개나 끓여야겠다.





사진:Pixabay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정은 KTX를 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