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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Apr 30. 2021

수영장 물을 다 마시고 말겠어

오만과 겸손 사이2

    우리 언니 오빠들은 운동 신경이 남달랐다. 학교 대표를 도맡아 육상 선수를 했었고 성인이 된 후로도 운동에서 희열과 위로를 찾을 만큼 운동 마니아들이다. 형제 중에서 제일 운동 신경이 없다고 구박받았던 나도 초등학교 때 반대표로 계주 선수를 하곤 했고, 중고등학교 시절엔 체육 실기나 체력장은 내 실력을 뽐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성인이 돼서 접했던 테니스, 배드민턴, 탁구, 볼링, 요가, 필라테스 등도 늘 빨리 배웠고 척척 잘 해냈다. 땅에서 하는 운동은 자신 있었다. 하지만 물속에선 사정이 달랐다.






     4년 전 오른쪽 무릎 연골 수술을 한 후 지인의 권유로 난생처음 수영을 배우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시커먼 수영복을 사서 시립 수영장 초급반에 등록했다. 첫 시간엔 가볍게 걷고 나서 강사가 한 명씩 물속 바닥을 보며 힘을 빼고 엎드려 보라고 했다. 다들 쉽게 해냈다. 내 차례가 되자 자신 있게 엎어졌지만 소리를 지르면 이내 일어났다. 너무 무서웠다. 강사는 어이없어하며 다시 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실패. 강사와 나머지 회원들은 신기한 어종을 발견이라도 한 듯 쳐다봤다. 첫 시간의 수치와 공포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어지는 킥판 잡고 음파 숨쉬기도, 사이드킥도 못해서 강사의 구박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나는 시립 수영장을 4번 만에 그만두었다. 강사의 구박도 구박이지만 20명이 넘는 같은 반 회원들의 실력과 연습량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훨씬 비싼 사설 수영장으로 옮겨야 했다


    사설 수영장엔 나와 같은 물에 대한 공포로 꽉 찬 맥주병 엄마들이 꽤 있었다. 그들과 함께라면 그 어떤 강사의 구박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습이 없는 날에도 자유 수영을 나가서 열심히 연습을 했다. 그러다 옆 레인의 늘 뱀 비늘처럼 생긴 화려하고 섹시한 수영복을 입는 마스터반 엄마랑 친해졌다.

"나는 언제 자기처럼 수영할까? 수영장 물을 하도 마셔서 코 소독만 하고 가네."

"언니, 이 수영장 물을 다 마신다 생각하세요. 그럼 어느샌가 늘어있을 거예요."

"그래, 내가 이 수영장 물을 다 마시고 말겠어!"


그러나 나의 굳은 다짐이 무색하게 실력은 징글징글하게 늘지 않았다. 다른 회원들이 한두 달이면 하는 킥판 없이 자유형 하기가 나는 석 달이 넘도록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사가 내 새끼손톱만 잡아도 되는 자유형이 그것마저 놓으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나는 물을 너무 무서워하고 있었다.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으니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숨은 쉴 수도 없었다. 힘을 빼라는 강사의 피맺힌 외침은 공허하기만 했다.


    지루하게 자유형만 할 수 없어 배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신세계였다. 숨 쉴 걱정이 없으니 배영으로는 인어가 된 듯 헤엄칠 수 있었다. 그러나 남들은 평영, 접영까지 다 끝내고 더 저렴한 시립 수영장으로 옮기는 와중에 나는 1년을 넘게 다니며 겨우 평형을 끝내고 시립 수영장으로 옮긴 후 코로나로 인해 수영과 잠시 이별 중이다.






‘성찰’은 자기중심이 아닙니다. 시각을 자기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의 존재를 상대화하여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배치하는 것입니다.  -신영복 <담론> p.72-


   

   나는 땅에선 새로운 것을 배울 땐 맨 앞에 있었고 늘 자신만만했다. 진도에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속으로 은근히 비웃기도 했다. 그러나 물속에선 2년 동안 초급반 맨 뒤에서 눈칫밥 먹으며 답답한 나 자신을 자책하면서 어느덧 교만 덩어리였던 나를 ‘성찰’하고 ‘겸손’에 자신을 배치할 수 있었다.


   길고 지루한 코로나가 끝나면 다시 수영장으로 복귀할 것이다. 그날을 위해 열심히 근력운동과 만보 걷기를 하고 있다. 그래도 다른 회원들을 못 따라갈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겸손한 꼴찌는 컥컥거리며 수영장 물을 마셔도 행복할 것이다.





상단 이미지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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