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래자랑 연대기
어린 시절 우리 집엔 늘 음악이 흘렀다. 일요일이면 전축에 그 당시 인기 가요나 팝송을 오빠들이 틀곤 했다. 조용필부터 시작해서 거의 마지막 LP였던 윤상 1집 그리고 제럴드 졸링 ‘Ticket to the Tropics’, 르네상스의 ‘Ocean Gypsy’ 등 우리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즐겼다. 성인이 돼서도 6남매가 노래방에 가면 자기가 예약한 노래가 아니어도 취향들이 비슷했기 때문에 다음 부를 노래의 반주가 나오면 서로 노래 부르겠다고 마이크 쟁탈전이 벌어지곤 했다.
우리 부모님은 노래를 잘하셨다. 엄마는 간드러진 가성으로 노래했다면 아버지는 다소 인위적인 바이브레이션으로 무장한 진성으로 노래했다. 엄마의 노래는 개운한 맑은 복어탕과 같다면 아버지의 노래는 진한 양념장을 풀고 향신채를 가득 넣은 잡어 매운탕과 같았다.
아버지는 총각 때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여는 노래자랑을 나갔다. 그 숫기 없는 아버지가 대중 앞에서 노래했다니 아마 음악을 무척 사랑했거나 사람들 앞에서 뽐내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형제 중 아버지의 예술적 재능을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 당연히 음악을 사랑하고 내 실력을 사람들 앞에서 뽐내고 싶어 하는 피가 내 안에 흐르고 있다. 무대 위에 올라가면 엔도르핀이 솟구쳤고 심장은 터질 듯하지만, 전주가 시작되면 이내 내 안은 평화로워졌고 관객의 얼굴이 보이면서 무대를 즐기게 되는 그런 끼가 있었다.
부산여고 1학년 때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우리 반엔 통기타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학교 축제였던 ‘승학제’를 준비하면서 통기타 동아리 회장이었던 친구가 내게 노래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흔쾌히 응했고 며칠 동안 고민 끝에 리처드 막스의 ‘Right here waiting’을 골랐다. 왜 그때 이 곡을 선택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일주일 동안 부르고 또 불렀다. 긴장한 탓인지 발표회 며칠 전엔 감기에 걸려 목 상태가 좋지 않은 채로 학교로 향했다.
발표회 날의 날씨는 완벽했다. 쌀쌀한 아침과는 달리 가을날 한낮의 햇살은 부산여고의 고즈넉한 건물과 고목의 이파리 하나하나에 빛나고 있었다. 음악실에 가보니 우리 학교 학생뿐 아니라 남학생들도 많이 있어 더 긴장되고 쑥스러웠다. 통기타 반 친구들의 훈훈하고 부드러운 통기타 반주가 시작되었다. 목 상태가 좋진 않았지만 무난하게 마쳤다. 쏟아지는 박수 소리, 친구들의 꽃다발과 찬사에 그날 오후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구름 위를 두둥실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2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두 번째 노래자랑 무대에 도전하게 되었다. IMF 시기에 큰오빠의 사업이 부도가 나자 우리는 집값이 싼 부산의 끝자락으로 이사해서 시집간 둘째 언니와 가까이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민노래자랑이 열린다는 플래카드를 보았다. 거기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해서 참가 신청을 했다. 그 무대를 위해 처음으로 낮에 혼자 노래방에 가서 연습하며 열심히 준비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엄마, 언니네 가족, 형부 지인들 그리고 내 친구 몇 명도 응원을 왔다. 참가곡은 최진희의 ‘미련 때문에’였다. 나의 중저음으로 깔리는 목소리는 최진희 목소리와 잘 어울렸다. 결과는 1등이었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큰 상에 어리둥절했다. 나보다도 돌아가신 형부가 더 좋아하시던 생각이 난다. 시집도 안 가고 좁은 집에 꼽사리 끼어 사는 시누이였던 나는 부상으로 받은 청소기로 올케언니를 기쁘게 해 주었다.
몇 년 뒤 큰 오빠의 이직으로 우리 집은 또 경기도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학습지 교사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회사에서 노래자랑을 개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기 남본부에 있는 모든 지점의 선생님들이 참가하는 꽤 큰 대회였다. 하지만 학습지 교사가 된 후 나는 성대 상태가 좋지 않았다. 말도 많이 하는 직업인 데다 일이 끝나면 동료 선생님들과 만나 고독했던 하루를 치맥으로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생활 방식은 성대에 독이었다.
그래서 거칠어진 성대에 맞게 이번엔 여자 가수 노래가 아닌 남자 가수의 노래를 선택했다. 참가곡은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Missing you’였다. 그때부터 생긴 ‘루틴’은 무대에 오르기 전 꼭 새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왠지 자신감 있게 노래가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료 선생님이었던 명희 언니와 미향이 언니랑 쇼핑몰에 몰려가 결전의 날에 나를 빛내 줄 옷과 액세서리를 신나게 골랐다.
대회는 서울랜드에서 열렸다. 대회가 가까워지자 가창력에서 살짝 자신감이 없던 나는 개인기를 준비했다. 동료 선생님과 함께 맹연습한 그것은 당시 개그 콘서트에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고음 불가’였다. 노래를 부르기에 앞서 장기자랑이 있다고 진행자에게 말하고 김종국의 ‘사랑스러워’를 ‘고음 불가’ 버전으로 선보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가 가발을 뒤집어쓰고 예상치 못한 음치 개그를 선보이니 객석에선 웃음이 빵빵 터졌다. 바로 그다음 감미로운 발라드곡의 전주가 흘렀다.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하며 노래에 집중했다. 이 반전의 효과였을까 나는 최우수상을 받았다. 당시 우리 부부는 연애 중이었는데 신랑이 한 아름의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우리 지점에선 단체로 버스를 대여해서 응원 왔었다. 공연장에서 버스가 있는 주차장까지 목에는 최우수상 메달을 걸고 한 아름의 꽃다발을 안고 걸어갈 때 국장님과 선생님들의 축하 인사에 세상은 내 것이었고 최우수상의 짜릿함에 그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고 바랐다.
사람들의 환호와 무대의 짜릿함이 잊히면 또 나는 무대를 찾아 어슬렁거렸다. 결혼하고 첫 무대는 신혼여행을 하고 온 그다음 날이었다. 시댁과 친정이 같은 아파트, 같은 동이었는데 양가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막상 가보니 아파트 10주년 행사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시장이 그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지금은 비리로 감옥에 가 있다) 그런데 노래자랑을 한다고 우리 언니가 나가라고 재촉했다. 그렇게 새색시는 부끄럼이나 주저함도 없이 아파트 공원에 가서 참가비 5천원을 내고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참가곡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던 최진희의 ‘미련 때문에’로 정했다. 아파트 행사이다 보니 취기 오른 어르신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아이들도 이리저리 까불어 대며 산만한 잔칫집 분위기 속에서 노래자랑은 끝이 났다. 이번엔 대충 불렀는데 1등이었다. 시장님께 1등 상품 텔레비전을 받았다. 그 상품으로 친정엄마 방의 TV를 바꿔드렸다.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 그 TV를 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