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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Jan 17. 2024

유전자를 이기는 힘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엄마는 없는 살림에 아버지가 좋아하던 보신탕, 백숙 등을 만들곤 했지만, 아버지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짜다 맵다 쉬지 않고 타박했다. 1981년 우리 가족은 전남 화순에서 부산으로 이사했다. 40대 후반이었던 아버지는 원양 어선 선원을 끝으로 73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돈을 벌지 않았다. 그러나 장거리든 집 근처든 택시를 타고 다녔고 술에 취해 살았다. 술기운이 오르면 당신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은 것은 여자 하나 잘 못 만난 탓이라고 자식들 앞에서 아무런 논리도 없이 엄마 욕을 하곤 했다. 

  엄마도 남 탓을 아버지 못지않게 한 편이다. 내가 보기엔 엄마는 원래 호전적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것 같은데 아버지를 만나 성격이 사나워졌다고 신세 한탄을 했다. 아버지의 인내 허용치가 자기 자신이었다면 엄마는 그보다는 조금 넓어서 자신과 가족까지였다. 남을 돕는 것을 금전적 손실이나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과 동일시해서 타인을 위해 시간, 돈을 쓰는 데 인색했다. 

  두 분 성격의 공통분모가 있었는데 그것은 깔끔함이었다. 그 성질 탓에 학창 시절 친구들을 집에 데려올 수 없었다. 이런 속도 모르는 친구들이 우리 집에 가자고 조르면 아주 난처했다. 하는 수 없이 부모님 몰래 친구들을 데려와 놀곤 했는데 애들이 가고 나면 정신없이 집을 치워야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엔 친척의 방문도 거의 없었고 우리가 초대받는 일 또한 드물었다. 아주 나중에야 우리가 가난한 것은 돈이 없어서도 있지만, 두 분의 마음이 가난해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성인이 된 후 선악의 기준은 오로지 내게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조금이라도 손해를 입으면 참지 않고 따지며 덤볐다.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았고 남에게 받는 것은 당연했으며 내 주머니에서 뭔가 나오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6남매 중 유일하게 아버지 엄마 양쪽 유전자를 물려받은 나는 그래도 부모님보다 친구들이 많은 것을 볼 때 사회화가 잘 된 이기적인 유전자가 된 것 같다.     



  2017년 가톨릭 신자가 되어 성당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은 순전히 봉사자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성당 외벽에 대형 트리 설치부터 미사 해설, 반주, 꽃꽂이, 성당 청소와 주일 학교 간식 만들기는 기본이요, 성당의 결혼식, 초중등부 교사, 복사단 (미사 때 사제를 도와주는 사람)까지 돈 한 푼도 받지 않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봉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봉사자가 부족해서 한 사람이 두세 개의 봉사직을 맡은 사람이 대다수였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남을 돕는 봉사는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고 봉사하는 사람들도 뭔가 꿍꿍이가 있으리라 믿었던 생각은 완전히 깨져버렸다.

  세례를 받고 3년이 지나자 홍보분과에 들어가 봉사하게 되었다. 거기는 성당 행사 사진만 찍어서 할 일이 거의 없다며 한 자매가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나를 그곳에 들어가게 하려는 사탕발림이었다. 홍보분과에서 일하며 옆에서 보니 분과장은 성당 봉사자 임원 회의 참석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행사 사진을 찍은 뒤 원고까지 써가며 월보, 연보를 만들고, 연말이면 본당 가로세로 퀴즈 출제, 시상 업무까지 하고 있었다. 완전히 발목 잡힌 것 같았다.

  홍보분과장을 전반적으로 도와야 하는 것과 함께 나의 전담 업무는 두 가지였다. 월보에 들어가는 미사 전례(미사 의식의 모든 절차)나 가톨릭 교리에 관한 기사를 쓰는 것과 사무실 앞 게시판에 그달의 행사 사진을 꾸며 올리는 일이었다. 내 보기엔 게시판 일은 쓸데없는 것 같았다. 사진들은 월보에도 나오는 것들인 데다 성당에 다니면서 게시판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가만히 앉아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고등학교 때 가정 과목의 과제였던 아기 조끼 뜨개질도 앞판, 뒤판을 친구 둘에게 과자를 사줘서 시켰던 내가 꼼짝없이 게시판 꾸미기에 투입된 것이다. 정말이지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다. 

  게시판 사진 꾸미기는 먼저 레이저 프린트기가 있는 신랑 사무실에 가서 사진과 각 행사 목록을 뽑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집에 와서 열 개 정도의 행사명을 오린 다음 2절 타공지에 월평균 20개 정도의 사진과 함께 풀로 붙이면 완성이다. 사진이 송알송알 붙은 타공지를 매달 넷째 주 토요일 중고등부 7시 미사에 맞춰 6시쯤 가서 붙였다. 그 시간은 초등부 4시 미사가 끝나고 성당이 잠시 조용해지는 때였다. 

  그러나 그날은 중학교 1학년 딸아이가 6학년 동생 견진성사(세례를 받은 이의 신앙을 성숙시키게 하는 성사로 거의 6학년 때 이뤄진다)의 대모가 되기로 한 날이어서 3시쯤에 도착해서 게시판 사진 교체를 시작했다. 

  사진을 꺼내자마자 초등학생 아이들이 강당에서 우르르 몰려나왔다.

“야, 우리 여기 있다!”

“너 진짜 웃기게 나왔다. 으하하” 수원 교구 성경 퀴즈 대잔치에 가서 응원하는 사진을 보며 아이들이 깔깔댔다. 

또 한 무리가 나왔다.

“어, 우리 할머니다!”

“신부님도 가셨네?”

“당연하지! 바보야!” 이스라엘 성지 순례 사진을 보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런데 우리 아파트 102동에 사는 유현이가 친구들을 따라 들어가지 않고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엄마 아빠 혼인 갱신 식(첫 영성체는 보통 초등 3학년에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미사에서 성체나 성혈을 받아 모시는 예식이다. 대상 아동의 부모는 아이로 인해 혼인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혼인 갱신 식을 갖는다) 사진만 기다렸는데 왜 없어요?”

아뿔싸! 사실 사진을 빼먹었는데 귀찮아서 다시 프린트하지 않았다. 

“미안해. 유현아. 다음 달에 꼭 붙일게.”

“다음 달엔 독일 가는데….”

“아, 맞다!” 유현이네는 아빠가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12월 초 독일로 떠나기로 되어있었다.      

  종교 생활의 하나로 봉사하면서 생각보다 보람은 거의 없었다. 대다수 성당 봉사자들이 그렇듯 의무감으로 할 뿐이었다. 그러나 사진을 붙이고 집에 가면 아이들이 그 앞에 몰려와 자신과 가족을 찾으며 지었을 웃음과 수다는 알지 못했다. 그날 발견한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과 유현이의 실망 덕분에 게시판 사진 작업이 더는 짜증을 부르는 일이 아닌 누군가에게는 한 달을 기다리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세례를 받은 지 7년 차인 새해에는 홍보분과장으로 고속 승진도 했고 우리 구역 반장까지 하고 있다. 홍보분과장 임명장을 받고 나오니 성당 자매들이 축하한다며 인사를 건넸지만, 표정은 ‘고생문이 열렸구나, 어쩐다니’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알면서도 봉사직을 수락한 이유가 있다. 허리 디스크로 힘들어서 나더러 대신 맡아 달라고 사정사정하던 우리 구역 전 반장의 부탁을 물리칠 수 없었고 어린이집 교사에 치매 시어머니를 모시는 홍보분과장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살다 보니 나와 가족만으로 가득 찬 내 안에 타인이 들어와 자리 잡는 날도 오는구나 싶어 웃음이 난다. 그 ‘사람’이 유전자를 이기게 해 주었다. 이로써 나는 부모님보다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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