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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Nov 21. 2023

영화는 지금도 상영 중

부산국제영화제의 추

  가을 태풍이 올라오는 10월 초에 부산국제영화제(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이하 BIFF)가 열린다. 20대 후반 오산으로 이사 오기 전 부산국제영화제가 움트는 것을 지켜봤고 그 후 두 번 더 영화의 바다에서 가슴 울렁이는 시간을 보냈다. 이맘때가 되면 영화를 보기 위해 정신없이 남포동 거리를 달리던 20대의 내가 보인다.      


  1996년 제1회를 시작으로 2023년 28회를 맞이한 부산국제영화제는 10월 초에 시작해서 10일간 부산 해운대 일대에서 펼쳐진다. 처음 영화제 영문 표기는 예전 부산의 영문 Pusan을 따라 ‘PIFF’였다. 2000년 첫 글자 P가 B로 변경되자 영화제 조직위원회는 부산 영상센터 준공 시점인 2011년부터 부산의 영문 머리글자 B와 일치시킨 ‘BIFF’로 변경했다. 명칭이 바뀐 것과 함께 주요 상영지도 초창기 PIFF광장이 있던 남포동에서 해운대로 옮기게 된다. 이로써 원도심인 남포동의 낙후된 극장시설, 해외 참석자들의 숙박 문제가 해운대로 바뀌면서 해결되었다. 

  요즘은 BIFF 영화표를 앱으로 예매할 수 있지만, 영화제 초창기에는 현장예매나 부산은행 텔레뱅킹을 이용했다. 회사원이었던 나는 영화제가 시작되기 한 달 전쯤 부산은행에 가서 영화제 상영 일정 및 간략한 작품소개가 들어있는 카탈로그를 구했다. 지금이야 영화제 출품작들에 관한 미리 보기를 제공하는 영화 유튜버들이나 블로거들이 있지만, 그때 영화 선택은 카탈로그를 며칠 동안 정독하며 전적으로 나의 동물적 감각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1순위 영화는 GV 표시가 있는 영화였다. GV란 Guest Visit의 약자로 영화 상영 시 감독이나 영화 관계자들이 직접 방문하여 영화에 대하여 설명하고, 관객들과 질의응답도 주고받는 무대를 말하는데 그 당시는 GV는 주로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GV가 있는 영화는 경쟁률이 어마어마해서 3번의 영화제에서 예매 성공한 GV 영화는 단 세 편 뿐이었다.

  영화제 개막 2주 전 대망의 예매일!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전화기 앞에 앉았다. 영화비는 편당 3천 원(개, 폐막식 상영작 5천 원)이었다. 전날 부산은행에 입금했고 정신 차리고 미리 찜해둔 영화 코드를 누르면 된다. 드디어 8시 30분이 되었다. 두 눈 부릅뜨고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전화기 숫자를 누른다. 열 편의 영화 예매 완료! 평균 열 개의 영화를 예매했는데 거의 혼자 보고 두어 개는 절친과 함께 보기 위해 사 두 곤했다. 


  BIFF에서 본 영화 중 낮에, 그것도 회사에 거짓말까지 하며 본 영화가 있었다. 부산 국제 영화제의 장점은 평소에 볼 수 없는 다양한 나라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대낮에 본 영화는 러시아 영화였다. 왜 내가 그 영화를 골랐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러시아 영화는 일에 찌든 청춘에 생기를 돋우고 거짓말의 긴장과 배보다 배꼽이 큰 왕복 택시비를 만회하고도 남아야 했다. 

  몇 회 영화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부산이 태풍의 영향권에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스트레스성 복통을 달고 살았다. 이 증상이 내 알리바이를 만들어주었다. 며칠 동안 계속된 장 꼬임 증상으로 대신동에 있는, 의사가 용해서 대기자가 끝도 없는 병원에 간다고 과장님께 거짓말을 하고 외출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택시를 타고 사상에서 남포동으로 향했다. 태풍에 가로수 잔가지가 꺾여 멋대로 뒹굴고 간판과 천막이 떨어져서 거리는 난리 통이었지만 대낮에 회사 밖으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은데 영화를 보러 가다니! 행복해서 픽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극장에 들어서니 평일 낮이라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첫 장면은 참으로 기이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 같은 것을 한창 비추고 있는 카메라. 곧이어 줌아웃하더니 그 괴생명체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여성의 중요한 부위였다. 그 부분을 극장에서 대형 화면으로 보다니 충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영화는 난해한 이야기 전개에 맥락 없는 정사 장면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영화는 진입 장벽이 높은 예술 영화로 제목이 「호색한」이었다. 고백하건대 그때 나는 제목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지금, 이 영화를 구글에서 찾아보면 “「Of Freaks And Men(이상한 사람들과 사람들에 대한 Про уродов и людей)」은 1998년에 개봉된 러시아 영화로, 19세기말 상류층의 퇴폐와 노동 계급의 가난과 절망 사이의 대조를 보여준다. 감독 Alexei Balabanov의 주목받는 작품 중 하나로, 그의 영화에서 비전통적이고 도전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능력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나온다. 졸다가 영화관을 나와버렸다. 회사라는 지옥의 바다에 다시 뛰어들기 전 평화로운 작은 섬 롯데리아에서 커피와 감자튀김을 먹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제3회 BIFF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새벽 1시에 끝나 택시를 타고 집에 가게 했던 일본 영화 「사후 생」이었다. (이후 「원더풀 라이프」로 변경되어 개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브로커」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유명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감독한 영화로 세상을 떠난 이들이 천국으로 가기 전 이승과 저승의 중간역 ‘림보’에서의 일주일을 그리고 있다. 림보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매주 월요일마다 찾아오는 망자들에게 전 생애가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주며 가장 행복했던 한순간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스태프들은 그들이 선택한 기억을 영화로 만들어 1주일 뒤 보여주는데 망자는 그것을 보면서 감정이 강렬해지는 순간 천국으로 가게 된다. 만일 추억을 선택하지 못한 자는 계속해서 림보에 머물 수밖에 없는데 그 직원들은 기억을 택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망자들이 선택한 장면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무릎에 누워서 귀 청소를 받았을 때, 어린 시절 지진 공습 때 대나무 숲에서 그네를 타고 놀던 기억, 오빠가 사준 빨간 구두를 신고 춤을 췄던 때의 설렘 그리고 더운 날 버스에 앉아 창밖에서 불어오던 시원한 바람을 맞던 순간들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어렵게 택시에 올라 집으로 향하면서 “이승을 떠날 때 꼭 가져가고 싶은 한 가지 기억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전까지 사후 세계나 지나온 삶을 돌아본 적도 없던 내게 영화는 낯설지만, 왠지 대답해야 할 것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인상 깊었던 GV 영화가 있다. 오스트리아 영화라는 것 말곤 영화 제목도 내용도 생각나는 게 없다. 다만 기억하는 것은 백발의 노감독과의 대화에서 배운 영화 보는 법이었다. 그는 영화란 극장에서만 보는 게 아니라 상영이 끝나고 길을 걸으며,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면서, 자려고 침대에 누워서까지 보는 것이라고 했다. 즉 영화는 극장을 나설 때 비로소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오산으로 이사 온 후 간간이 뉴스에서 들려오는 BIFF 소식에 가슴이 뛰곤 했지만, 부산국제영화제는 다른 나라 행사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극장은커녕 집에서 넷플릭스나 쿠팡 플레이와 같은 플랫폼으로 영화를 본다. 하루에 한 편 볼 때도 있으니 이제 영화는 킬링타임용이나 설거지 노동의 윤활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영화는 내가 어디에 있든 곁에 있었다. 오래전 비디오로 「중경삼림」을 네 번이나 본 뒤 경찰을 짝사랑하는 핫도그 집 종업원 페이가 되어 보기도 하고 「원스」를 보고 나서는 아일랜드 더블린 거리를 기타를 메고 거니는 상상도 했다. 어제는 「리턴 투 서울」을 보면서 프랑스 입양인인 프레디의 눈빛이 무얼 말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영화가 인도하는 낯선 길만큼 나의 품은 조금 넓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생경한 곳에서 느꼈던 다채로운 감정의 총합이 지금의 나일 것이다. 

  내년 10월엔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서 영화를 봐야겠다. 그리고 땅거미가 지면 예전 영화제의 메카였던 남포동으로 갈 것이다. 부산 사투리가 귀에 콕콕 박히는 지하철 안에서, 화려한 변신을 한 BIFF 거리의 노점상을 스치면서, 자갈치 시장의 명물 탄내 나는 쫄깃한 곰장어 볶음과 소주를 마실 때도 영화는 내 마음에서 상영되고 있겠지.                               




사진:코리아 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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