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자정을 카운트다운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초부터 쌓여있는 설거지가 많으면 재수가 좋지 않을 것 같아 설거지를 했고 그러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와 청소하다가 그렇게 12시가 허무하게 지나가버렸다. 어쩐지 아쉬울 법도 하지만, 나름 서른 여섯번째 카운팅을 하는 것이다 보니 그게 그렇게 또 아쉽지는 않았다.
아침에는 공덕으로 향했다. 지난번 먹었던 비파티세리의 퀸아망이 맛있어서 나름 우아하게 퀸아망과 더불어 몇가지 빵을 곁들어 커피와 함께 정초 아침부터 즐기기 위함이었다. 햇살이 적당히 들어오는 창가 자리에 앉아 신년을 맞아 구매한 주황빛의 다이어리를 펼쳐 지킬수 있을지 모르는 다짐들 몇개를 적어 내려가고 다음날이면 잊어버릴 수다를 떨었다.
거리에 차는 적당하고 서울은 늘 아름다워 정처 없이 운전을 하며 시내를 돌았다.
'마트를 갈까?' '공원을 갈까?' '배고프진 않아?' '하고싶은 거 있어?'
질문들은 가볍게 떠다녔고,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흘러나오는 음악을 흥얼거렸다.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은 운전은 생각을 느슨하게 하고, 대신 오래 묵은 기억 같은 것들을 불쑥 끌어올린다.
그때 이튿날 본 추억꾸러미가 문득 떠올랐다.
연말인 30일에는 본가에 들러 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했다. 조금 일찍 업무를 마무리하고 본가에 갔더니, 모두 외출해 있어 나 혼자였다. 괜스레 심심해져 예전 내방이었던 곳을 둘러보며 이곳저곳 뒤져보았다. 빛바랜 파란색의 직사각형 박스가 옷장구석에 있었다.
10대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 쓰였던 다이어리와 온갖 편지들이 수북히 모여있었다. 또박또박 한글자씩 적어내려간 꺾여버린 관계와 감정들, 이유없는 희망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그때는 분명 그 감정에, 사람에, 상황에 죽어버릴 수도 혹은 날아가 버릴 수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내려써간 글을 읽어보아도 너무나 낯설었다. 기억나지 않는 이벤트가 너무 많았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약간의 현기증이 올라와 뚜껑을 닫았다.
낭설이지만 몸안에 있는 세포는 7년을 주기로 모두가 바뀐다고들 한다. 박스 안에 누워있던 한참 전의 나는 지금과는 무척 다른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랬었지..'
하며 옆 자리에 앉아있는 이에게 이야기하면서, 9년전 정초가 떠올랐다.
그때, 맞다
아, 나 콱 죽고싶었지.
스물여섯을 마무리하던 때, 스물일곱을 가꿔나갈 에너지가 고갈됨을 직감하였을 때.
타이페이의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하게 터지는 불꽃들을 바라보며 몸이 굳어감을 느꼈다.
'좆됐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곤 시장 여느 거리에 있던 자그마한 숙소에 들어와 펑펑울었다. 그래, 벌써 거의 10년이나 된 일이다.
힘들었던 그 때를 어찌저찌 버텨내고 이렇게 살아있다. 그게 그렇게 신기하더라, 내가 드디어 서른여섯이다. 반복되지만 조금은 다른 일상에서 약간의 시시함과 지루함을 느끼며, 또 기뻐하며 나름의 궤적을 그려왔다.
늘 엄격하고 다소 냉소적인 엄마에게
"엄마, 끝까지 웃는자가 이기는 사람이야. 끝까지 웃으려면 자주 웃어야해"
할줄도 아는 그런, 서른 여섯이 됐다.
여느때와 다르지 않게 새해의 첫날을 보내고, 저녁을 먹기 전 잠시 들른 마트의 주류코너에선 적토마의 해를 기념한다는 와인을 발견했다. 뻔한 상술이라는 걸 알면서도 냉큼 집었다. 속아 넘어가면 웬지 좋은 기운을 줄 것만 같았다.
적당히 권태롭고, 지루하고,
이따금 웃음과 눈물이 나는 이 삶을 위해-
토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