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장례식

by nikki

2년전 초여름 외할머니를 보냈다.


노환이 들면서 자그마한 요양병원에 거처를 마련했던 할머니를 코로나로 인해 자주 보지 못하였다. 코로나 이전에도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렇게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었다. 그러다 여름이 막 시작되던 날 할머니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가기 위해선 코로나가 걸리지 않았다는 확약서가 필요했고, 급하게 요양병원 근처 명지병원에 들러 PCR 검사를 마쳤다.


작은 1인용 침대에 누워있던 할머니는 몰라보게 앙상해졌다. 기계의 힘을 빌려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고, 이따금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마치 깊은 잠에 몰두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눈 떠봐, 할머니" 몇번을 나직이 이야기하고, 가볍게 할머니의 앙상한 몸을 흔들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근처럼 무거운 눈을 가끔씩 뜨곤 했다. 그 눈으로 나를 보았다고 믿고 싶다. 그렇게 다음날 할머니는 그날 밤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80여 년의 세월을 거쳐간 할머니의 삶의 궤적을 더듬어보고 싶었다. 역사에 이름을 날리지 못해도 누군가, 그 누군가가 가장 사랑했던 핏줄이라면 조금 의미 있지 않을까?그렇게 기억 속에 할머니는 살겠지.


1947년생 돼지띠,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이계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할머니를 가장 잘 설명하는 키워드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내가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했을때 부터 할머니는 큰글씨 성경을 늘 손에 쥐고 늘 찬송을 흥얼거리곤 했다. 할머니의 영향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어떤 거대한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 그걸 신이라고 부른다면 신을 믿지만 교회는 가지 않는 나도 아직까지도 여러 찬송가와 성경구절을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곤 한다.


할머니에게는 두 명의 오빠가 있었다고 한다. 전쟁통 때문인지 어쩐일인지 소식이 끊겼다고 하여 나도 그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알지 못한다. 나이 대에 비해 큰 키를 갖췄던 할머니는 그 시절 소녀들이 그렇듯 어린나이에 시집을 가 슬하 네 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중, 셋째 딸이 우리 엄마다. 훤칠하고 잘생긴 할아버지는 전쟁 때문에 한 다리를 온전히 쓰지 못했고, 그랬기에 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노상에 나가 떡을 팔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주 취할 때까지 마신듯 하다. 술먹고 신세한탄(웬지 내 초창기 술버릇은 할머니를 닮은듯)했던 모습을 엄마는 아직도 진절머리를 낸다. 그럴만도 할것이 네 자녀를 먹여살려야 하는 삶의 고단함은 단지 상상만 할 수 있는 수심이겠지.


그러다가 구세주, 말 그대로 예수 구세주가 할머니의 삶에 나타난 것이다. '예수믿고 새 삶 찾은' 할머니는 그 뒤로 음주를 멀리했다고 한다. 소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던 할머니는 성경을 몇 번씩이나 반복하며 읽고, 주님을 삶속에 받아 들였다. 종교의 긍정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에 매우 가까웠다. 지역차별도 있었고, 늘 그렇듯 호남을 싫어했으며 유신정부 시절 통장까지 도맡기도 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지독한 남아선호사상주의(!)였다고 한다.


사실 이 지점이 내게는 가장 미스터리한 부분이다. 할머니는 나를 가장 예뻐했다. 나는 손자가 아니고, 또 할머니가 금쪽같이 아끼는 아들이 낳은 딸도 아니다. 그래서 고백하자면, 나는 할머니가 여타 미디어에서 비추거나 주변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딸과 손녀를 천대하고 아들과 손자를 사랑하는 그런 구닥다리 사상을 갖추지 않은 것에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삼남매 중 첫째 딸인 나는 유달리 외할머니의 사랑을 분에 넘치게 받았다. 우리 엄마조차 할머니의 제일 애정하는 딸이 아니기에 지금 생각하면 의아한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 할머니가 최고 애정하는 자녀는 막내 아들, 즉 나의 막내 삼촌이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내 의식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부터 항상 나를 예뻐했다. 이를테면 가족 모임에 이따금 늦거나 참석하지 못해도 자신이 어디선가 구해온 포도 중 가장 탐스러운 포도를 나를 위해 남겨두거나,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취향을 기억하곤 그 음식을 반복적으로 먹이는 그런 유달리 티가 나는 따스함 말이다.


그런 따뜻한 할머니에게 나는 많은 걸 해주지 못했다. 코로나라서, 바빠서, 해외여서 나는 자꾸 할머니를 만나는걸 미뤘다. 1년간 해외에 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본 할머니는 눈에 띄게 치매를 앓고 있었다. 내 이름을 기억하며 웃었지만 다시 또 누구야? 라고 물었다. 그런 할머니가 낯설고 안쓰러워 엉엉 울었는데, 그후 요양병원에 간 할머니를 코로나라는 핑계로 자주 찾아가지 않았다.


내가 바쁘게 삶을 살아 나아갈 때, 할머니는 동시에 엉겁의 시간을 요양병원에서 보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장례가 끝나고 입관 전 곱게 한복을 입은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는 늘 양정장을 선호했는데, 왜 하필 한복을 입혔을까? 너무나 작은 아기처럼 포대기에 싸여진 할머니를 보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왜 사랑한다고 더 많이 말해주지 못했을까, 고맙다고 해줄걸, 더 많이 찾아뵐걸. 심지어 7살때 할머니한테 괜히 심통부렸던 기억까지 전부 다 떠오르면서 눈물이 나더라. 염치도 없다.


발인을 위해 화장터로 향했다. 고양시 벽제에 위치한 화장터는 꽤나 신식으로 모든 것이 공장형으로 효율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할머니가 재가 되기 위해선 1시간 남짓의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이 거친 얼굴을 하고 대기실에 옹기종기 모여 할머니를 기다렸다. 할머니의 대쪽같은 정치성향과 지역감정, 고집스러웠던 성격 좀 쿨하지 못한 할머니의 모습들을 저마다 회상했다. 눈물이 주룩주룩 나다가도 그런 모습이 웃겼다.


나는 할머니를 기억하고 싶다. 내게 할머니는 위인이다. 살아갈수록 더 그렇다.

못배웠지만 명석했고, 가난했지만 억척스러워 책임감 있게 아이들을 키웠고, 서툴지만 사랑이 많다.

내가 없어져도, 그녀를 기억하는 이가 모두 사라져도 여기 디지털 조각하나를 뒤늦게 남기는 이유다.


이계운 여사,

꿈많던 소녀였고, 책임감 있는 엄마였고, 사랑이 많은 할머니었던,

요리를 잘하고 정이 많아 손이 크며 키도 큰, 기도와 사랑으로 가족을 늘 생각하고 아꼈던,

지금은 그녀가 그렇게 믿고 의지한 주님 품에 영원한 평안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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