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몰랐고 지금은 아프다

불행 총량의 법칙

by 디셈버리


-오전 반차를 써도 될까요?


드디어 2011년식 낡은 중고차의 앞범퍼가 내려앉았다. 비포장도로와 시골길을 번갈아가며 쉴 새 없이 출퇴근을 함께 해줬지만 에어컨도 고장난 상태였다. 자주 가던 카센터 사장님은 수리비용 아깝다고 항상 대충 손을 봐주시면서 그냥 가라고 하셨으니 이제 때가 된 것 같았다.


-아주 내년연차까지 땡껴쓰지 그래요?


남자 팀장이 비꼬듯이 말했는데 사실은 땡껴쓰는 중이 맞았다. 사장님은 법정 근무시간이라던가 수당, 등에 대해 항상 잔뜩 화가 난 상태였는데 팀장까지 비아냥 거리자 그냥 가지 말까, 도 싶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하지만 내 아이의 안전이 더 중요했다. 애엄마는 자존심 따위 없지.

꾸벅 인사하고 나와서 맞은 편 버스정류장에서 15분을 기다리자 평화로까지 가는 버스가 왔다. 중간에 내려서 다시 평화로에서 서귀포 시청까지 가는 버스로 갈아탄 뒤 내려서 한참 걸어올라가자 시청 청사가 나왔다.


중고거래 어플에서 주고받은 연락처로 전화를 걸자 어여쁜 목소리의 여자분이 받으셨고 그렇게 우리는 1층 민원상담실 근처에서 만났다. 서로 가져온 서류를 주고받고 명의변경, 인도등에 따른 작성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여자분의 남편분 계좌가 적힌 쪽지를 받았다.


-350만원 맞을까요?


여자분께 물어보자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혼자왔다, 아이를 태운다더라, 흡연차량인지 아닌지 물었다 등등 나를 앞에두고 통화를 하는 내용이 들렸다.


-블랙박스가 없기도 하고 아이랑 타신다니까 남편이 깎아주라네요?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그럼 320만원 송금할게요. 입금자명은 *** 입니다.


살랑거리는 연보라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분은 계속 남편과 통화연결을 끊지 않고 입금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단지 몇 초 였다.


-도망... 가고 싶다.


눈을 내리깔자 앞에 서 있는 여자분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웨지힐 샌들사이에서 반짝이는 예쁜 패디네일이 보였다. 그러자 비로소 내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는 만원짜리 슬립온을 보자,

맨얼굴과 신발이 부끄러워졌다.


-여기 열쇠요.

-감사합니다. 잘 탈게요.


여자분이 내미는 열쇠를 받고 도망치듯이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자 덜덜 거리는 소음도 들리지 않았고 공기마저 청량한 기분이었다.


-에어컨 바람이 이렇게 시원할 일이야? **가 좋아하겠지?


부끄러움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빨리 돌아가서 퇴근 하고 내 아이를 데리러 가고 싶었다.


-자, 할 수 있어! 가보자.


나는 서귀포 시청에서 서쪽 중산간 마을까지 운전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겁이 많았고 속도감을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오전반차 시간에 맞추려면 빨리 서둘러야 했다. 바짝 긴장한 상태로 몸을 앞으로 내밀고 운전했다. 사무실에 다시 돌아오자마자 밀린 업무를 시작했다.


-밥도 못먹었지? 이거 이따가 몰래 먹어.


주에 3회 오시던 매표소 고모님이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챙겨왔다면서 휴지에 쌓인 부침개를 주셨다.

식은 부침개가 얼마나 맛있던지 대낮의 부끄러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5시간 후에 퇴근하자마자 새로 산 중고차를 끌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어때? 시원하지?


아직 말을 못했던 나의 아이는 작은 손바닥 두개를 연신 마주치며 기쁘다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땐 몰랐다. 나의 작은 세상에서 함께 해주는 내 아이가 있어서 몰랐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팠다.


내 못난 과거를 마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못난 과거를 안고 있는 내게, 친척 어른이 말씀해주셨다.


-불행총량의 법칙이 있단다. 너는 그걸 다 채워가고 있으니 힘내보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믿는 것이 힘들다. 하지만 너무 따뜻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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