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어느 이벤트의 당첨되어 저자가 사인본을 보내 준 적이 있었다. 그는 학계의 저명한 교수로, 기대와는 달리 그다지 재밌진 않아서 처음부터 다시 읽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관리 부실로 책 일부가 물에 젖었고, 저자 사인본에 내 이름과 심지어 하는 일까지 적혀 있어 중고 서점엔 내 놓을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누구 하나 가져가겠다고 하지도 않는다.
생각해보니 책을 좋아면서도 이래저래 험하게 다룬다. 가방에 넣어 놨다가 비를 맞는다던지, 걸어가며 읽다 떨어뜨리거나, 컵을 잘 못 두어 미끄러졌다던지 등등, 책의 수난사만으로도 한 페이지는 나올 것이다.
자취방은 포화 상태가 되었고, 대부분의 살림살이인 책도 이제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버릴 책은 그 책이었다. 사인본이라 버리지 못한 것, 버리면 마치 죄인이 되는 기분이고, 그 저자가 반드시 이를 알아낼 것이란 불안감, 그리고 언젠가 내게 돌아올 원망 등등. 그러나 죄책감으로 남은 삶을 모두 채울 순 없었다.
사인이 된 속지 한 장을 떼었다. 따로 보관할 것이지만, 책은 버린다. 마침내 나는 책을 두고 양심을 팔고 말았다. 인디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양심은 삼각형처럼 생겼고, 나쁜 일을 하면 빙글빙글 돌며 모서리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뾰족한 끝이 닳아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