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긴긴 밤을 함께 보낸 당신

by Nima

1시간 더 넘게 기다렸던 티켓팅이 시작되고, 난 아사 직전 상태로 눈만 겨우 뜨고 있었다. 12시 10분정도가 되어서였나,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었고, 아까의 그 흑인 아저씨가 근처를 배회했다. 이 아저씨가 티켓팅, 그러니까 밤손님들을 제자리에 앉히는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기차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기차에 제일 먼저 올라탔다. 하얀 이빨의 아저씨는 나를 보고 ‘난 너를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얀 미소를 보여주었다. 아저씨는 내게 텅텅 빈 객실의 정 가운데 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드디어 앉아 보는 내 자리, 내가 이 객실에 앉기까지 어떤 고생을 했는지 말해줄 사람이 없는 게 한이다. 아무렴 어때, 나는 이제 의자에 녹아내리면 ‘고생 끝‘이었다.


“어?”

“Bonsoir (안녕하세요? - 프랑스어)”


이것은 무슨 조화인가. 아까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던 남자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자애로운 까만 아저씨의 안내를 받아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는 내 앞자리에 가방을 놓으며 작은 목소리로 아는 척을 했다. 그렇게 수줍은 척은 혼자 다해놓고 또 나를 따라오다니. ‘의지의 한국인’은 달라.


“그 쪽 스페인 가요?”

“네.”

"아까 그런 말 안 했잖아요?”

“처음에 했죠. 영어로.”


그랬던가. 백지장이 되어 버린 내 머릿속에는 쥐어짜고 탈탈 털어도 이 남자가 스페인간다는 소개를 들은 기억은 없었다.


“난 못 들었는데.”

“뭐, 지금 아셨네요. 저도 스페인에 갑니다.”

“자리는 여기 맞아요? 저 따라온 거에요?”

“티켓 보실래요?”

“아니 뭐, 그건 아니구. 어머, 이게 웬일이야.”


남자는 나의 '공주병 중증환자'스러운 심각한 코멘트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코트를 벗고 목도리를 풀었다. 원래부터 공주병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건만, 딱히 할 말은 없는데 반가운척을 하고 싶은 내 마음은 주책맞게 자꾸 마음에도 없는 공주 코멘트를 쏟아냈다. 다른 주제 뭐 없을까.


“안 추우세요?”

“네.”

“파리 겨울이 원래 이렇게 추운가? 저는 겨울은 파리가 처음이라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


남자는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려 웃는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가방을 정리하고 뒤통수를 보이며 앉았다. 그래, 뭐 자꾸 말을 하니. 이제 정말 안전하게 기차도 탔고, 자다가 내리면 된다. 반가움과 머쓱함이 알맞게 버무려지면서, 흥분한 강아지마냥 높아졌던 나의 숨소리도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머리카락들이 보기 좋게 스타일 잡혀 있는 멋쟁이 뒤통수였다. 좁고 밀폐된 이 열차 안에서 묘하게 풍기는 이 남자 냄새는 탑 노트에 시트러스(Citrus: 열대 과일의 한 종류)라도 가득 담은 향수 같았다. 나는 저 아름답고 향기로운 뒤통수를 감상하며 이 밤을 보내게 되는구나. 눈이 가물가물 감기려고 했다. 피곤했다. 낮 비행기 타느라 서울에서도 일찍 일어났고, 기내에서는 어린애들때문에 잠을 설쳤다. 나는 머리만 대면 자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그렇게 배가 고팠어도 조용히 잘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남자가 부시럭 거리며 그 망할 놈의 '바게뜨 샌드위치'를 꺼내지만 않았다면, 난 그냥 닥치고 자 줄 수도 있었다.


“어어허어어어…….”


배고픈 거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돈이 없어 빵 한 조각 못 먹었던 나는 최양락 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추하다고 지적한 일을 하고야 말았다. ‘남 먹을 때 저도 먹고 싶다는 소리 좀 내지 말라’던 아저씨의 가르침, 나는 그 가르침을 지켜야 하는 지 고민할 새도 없이 남자가 먹겠다고 꺼낸 샌드위치의 냄새를 맡자마자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토마토 향과 브리(Brie: 향이 독특한 치즈의 한 종류) 치즈 향기'가 멋쟁이의 뒤통수를 관통하여 내 코로 박혀주는 그 순간, 나는 사냥개가 주인 보고 칭얼거리는 것 마냥 묘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남자는 주춤거렸다. 한 입 베어 물면 그만이었을 그는 모질지 못한 남자였다. 그는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드실…래요?”

“정말요?”


그런 반색을 내 평생 다시 또 할 수 있을까.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 ‘정말요?’를 뱉던 나는 주인 보고 점프하는 개 같았다. 손 만 안 뻗었지, 어서 달라고 보채는 그 꼴은 두고두고 얼굴이 화끈 거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몸은 이미 그 남자의 의자 머리를 꼭 쥐고 기울어져 있었다.


“음, 잠깐만요. 치즈 맛이 좀 강한 게 샌드위치에 들어 있는데 괜찮아요?”

“브리 치즈 아니에요? 저 좋아해요.”

“하하하.”


그는 종이 꾸러미에 쌓인 바게트 샌드위치 나머지 반쪽을 조심스럽게 분리했다. 냅킨까지 두 장 쥐어주는 그의 사려깊은 손이 민망하도록 나는 ‘나는 새가 먹잇감을 낚아채 듯’ 신속하고 정확하게 그가 잡은 샌드위치를 ‘덥썩’ 빼앗아 들었다. ‘고맙다’는 말을 한 것은 내 입 안에 그 까끌까끌한 바게트의 1/3이 이미 입장을 마친 이후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오늘 여러모로 한국사람 덕 보네요.”

“네.”

“아까 빵집은 신용카드 안 된다고 해서 아무것도 못 샀어요.”

“왜 안 해줬을까. 얼마 결제하려고 했는데요?”

“2유로(Euro)?"

“음, 그럼 좀 어려웠겠네요.“


나는 바게트 덕분에 입천장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너무 맛있어서 울고 싶었다.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바게트 샌드위치를 사이좋게 나눠 쥐고 우적거리는 모습은 내 계획에는 없었지만, 꽤나 편안했다. 그 때, 창가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창문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기차가 출발하나 봐요.”


우물거리면서도 우아하게 그 딱딱한 빵을 먹던 그가 ‘차가 출발한다’며 알려준 의도는 아마 먹느라 정신이 팔린 나에게 조심해서 먹으라는 뜻이었으리라. 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객실은 텅 비었다. 이 열차 칸은 우리뿐이었다. 티켓팅을 하던 까만 아저씨가 사라지고, 좀 전까지 내 온 신경이 다 일어서게 했던 이 문제 많은 기차는 그렇게 텅 빈 객실을 안고서 서서히 파리를 떠나고 있었다.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벌써 출발하네.“

“이 코스는 사람들이 잘 안가는 코스죠. 밤 기차로 스페인을 가는 것은 아주 급할 때나 하는 일이에요.“

“그래요? 그럼 다들 어떻게 가죠?“

“이지 젯 (Easy Jet: 유럽의 저가항공)을 많이 이용하죠. 미리들 예약하면 싸고 빠르니까요.“

“그런가, 진짜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그것은 나의 혼잣말이었다. 굳이 대화를 해보자는 시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남자는 착하게도 내 한마디 넋두리를 무시하지 않았다. 나의 개고생 사연을 들어주려고 했다.


“파리에서 여행하고 스페인 가시는 거예요?”

“아니요. 저는 배낭여행 온 사람이 아니구요, 사실 마드리드에 어학연수 하러 가요.”

“한국에서 공부하러 오신 거예요?”

“네.”

“언제 왔어요?”

“오늘요. 대한항공은 저녁 비행기로 도착하는지 몰랐어요.”

“어? 파리에 오자마자 바로 당일에 스페인 가는 밤 기차를 탈 생각을 하신 거예요? 파리 시내를 둘러보지도 않고?”


놀랄 일이지? 나도 안다. 하지만 너무 놀란 표정 짓지 마. 나도 이렇게 기차를 타게 된 것을 수천 번 후회했다구. 항공사를 바꿔서라도 마드리드 직항 비행기를 끊으라던 엄마의 조언을 왜 홀대한 것인가. 자고로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했다.


“파리는 몇 번 왔었어요. 배낭여행 한 번. 엄마랑 패키지여행 한 번……. 굳이 뭐 또 둘러볼 일은 없죠, 나중에 세일할 때나 다시 오면 몰라.”

“왜 마드리드로 바로 가는 비행기를 안 끊으시고요.”

“대한항공 좌석이 없더라고요.”

“대한항공만 쓰실 이유가 있어요?”

“이거 쌓이잖아요, 마일리지 쌓는 거, 그것도 무시 못해요.”

“하하하하하하.”


남자는 나를 만난 첫 순간 이후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 남자더러 웃으라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가 웃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는 오늘 내게 닥친 재앙 가운데 유일한 희망이었고, 일용할 양식을 나누어 준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급의 슈퍼스타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오빠‘라고 불러주기로 했다. 그것은 한국 여자들에게 있어서 대단한 처우이며 나로서 최고의 대접이었다.


“오빠는 어디가세요? 마드리드?”

“저요? 저는 바르셀로나요.”

“엥? 이 열차가 바르셀로나도 가요?”

“아뇨. 이 차는 스페인 국경까지만 가요. 스페인은 TGV가 못 다니거든요.”

“네?”

“그래서 제가 아까 갈아타냐고, transfer(환승)하냐고 물어본 거예요, 이 밤에 스페인 갈 차는 하나니까, 마드리드건 바르셀로나건 이 차를 타고 가야하니까요.”


세상에. 진짜 Jesus 일까. TGV 스케줄을 꿰고 있는 것도 모자라, TGV 노선이라도 그릴 이 기세! 도대체 이런 박식함은 어디서 나오는가! 오빠는 무엇을 하는 귀인인가요, 나는 행복해진 위장 덕분인지 격하게 나긋나긋해졌다.


“어쩜 그렇게 잘 아세요? 원래 유럽에 사는 사람같이.”

“저 유럽 살아요.”

“어머, 유학생? 어디요? 파리에서 공부하시는 거예요?”


그는 내 쪽을 잠깐 바라보았다. ‘너 참 말도 많다’였을까. 아니면, ‘네가 알아서 뭐하게’였을까. 그는 정말 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나는 입에 남은 브리 치즈 조각을 얼른 삼켜버렸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정면으로 쳐다본 그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나는 얼음이 될 것 같았다.


“음, 여기 사는 건 아니지만, 바르셀로나 음악 학교에서 기타를 몇 달만 좀 배워보고 돌아가려고요.”


남자는 잠시 샌드위치를 감싸고 있던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처음 보는 여자한테 시시콜콜 이력서를 읊어야하는지를 고민하는가. 하지만 우린 그거 말고는 할 이야기가 없지 않은가. 지루하게 가느니 우리 서로 편한 얘기나 해요. 나는 계속 너무나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음악 전공이에요?”

“아뇨, 음악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전공이요.”

“그럼 기타 공부는 그냥 취미로? 어머, 멋있다!!”


남자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사실 스페인을 좀 가보고 싶었어요. 겸사 겸사 기타도 배우고, 여행도 하고 하려고요. 이제 취직하면 몇 달씩 바르셀로나에 머물면서 시간을 보낼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아르바이트 한 돈 모아뒀다가 이제 쓰는 거구요.”

“맞아, 유럽은 유학생도 아르바이트 다 한다더라, 미국만 학생들 돈 못 벌게 하고. 학생들이 일하면 불법체류니 뭐니 욕하고 구박하고, 지네 나라에서는 돈만 쓰고 가라고 하는 게 어디있어, 그죠? 유학생들 시급 몇 불짜리 일도 못하게 하고 치사하게 굴고…….”

“하하. 미국에서 공부하세요?”

“아뇨, 우리 오빠요. 저도 미국 가려고 공부는 하는데…….”


유학가라는 등쌀에 못 이겨 GRE이며, TOEFL이며 서른이 넘도록 학원을 돌아다녔지만, 정작 나는 미국에 공부하러 가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석사를 따면 뭐하나, 박사를 따면 뭐하나. 나는 그런 것들이 별로 신나지 않았다. 그냥 앉아서 이대로 늙지 않고 버티는 방법은 없을까. 도망갈 궁리만 했다. 스페인 어학연수라는 이 기회도, 공부가 하기 싫고, 학위 빨리 안 따려면 시집이나 가달라는 엄마 아빠의 구박을 받기 싫어서 겨우 생각해낸 도피처였다. 한달 짜리 어학 연수. 이게 무슨 연수인가, 한 달을 제대로 잘 놀겠다는 다짐이지. 나는 조금 창피해졌다. 내 숙연한 표정은 남자를 조금 당황하게 한 것 같았다.


“자세히 얘기 안 해도 되요. 미국 안가도 다 살 방법 있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하,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네, 근데 오빠는 뭐 전공인데요?”

“저는 식물관능 전공입니다.”

“식물 관능? 관능? ‘관능미’ 할 때 관능? Plant (식물) Sexy(관능미 있는)?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의 무식함은 이 밤, 글로벌 버전으로 오픈된 것이 확실했다. 내가 웃는 이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역시 웃어줬다.


“하하, 재미없는 부분이죠.”

“왜 재미가 없어요, sexy plant를 보는 게 재미없나? 하하하하하하. 근데 식물이 섹시한 건 기준이 뭐에요?”

“sexy plant?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그와 나는 시속 300km로 달린다는 TGV 열차 칸이 흔들리도록 크게 웃었다. 둘 다 춥고 배고픈 순간을 모면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정말 웃겨서 그랬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 그 만남의 순간과 비교해서 지나치게 친밀해졌다. 좁은 공간, 사적인 대화는 그렇게 생판 처음 보는 당신에 대해서 어떠한 경계도 갖지 않도록 나를 무장해제시켰다. 이것이 토마토 바게트의 은덕인가, '오빠'의 영험한 능력인가. 나는 언젠가부터 이 오빠에 대해 경계하지 않고 있었다. ‘전지전능’의 남자, 오빠가 물었다.


“마드리드는 얼마나 있으실 거예요?”

“어학연수? 한 달 코스로 왔어요. 놀러왔죠 뭐.”

“좋네요. 공부하러 오기에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스페인으로 공부하러 와서 비행기는 계속 파리에서 타요. 갈 때도 또 파리에서 서울로 가는 걸로 해놨어요.”

“한 달 뒤에 또 파리로 올라가서 집에 가게요?”

“네. 그 때는 세일 기간 막판이니까 파리에서 뭐 건질 거 있나 싶어서 우선 그렇게 해놨는데, 있어보고 괜찮으면 마드리드에서 한국 가는 걸로 바꾸려고요.”

“네.”

“근데, 오빠는 바르셀로나에서 기타 배우는 거 몇 개월 코스에요?”

“몇 개월 이렇게 하는 코스는 없고, 한 달씩 레슨을 받는 것인데, 회사에서 이제는 오라고 할 때까지 되는 대로 버티고 싶어요.”

“뭐 배우는 데요, 무슨 기타?”

“클래식 기타 같은 것인데, 조금 다른 거예요.”

“아, 스페니시 기타? 그거 너무 좋아.”

“아시네요?”


기타 종류라고는 ‘스페니시 기타’ 하나 알고 있었는데 그걸 딱 맞춰서 배워주다니. 오빠는 정말 나랑 '찰떡궁합‘이군요! 나는 괜히 더 신나는 척 해줬다. 살면서 딱 한 번, 스페니시 기타 연주를 가까이에서 들은 적 있다. 그게 뭐였더라? 아마 우리과에서 하는 무슨 행사였을 텐데, 연주하는 내내 묘하게 슬픔을 긁어주던 그 스페니시 기타의 선율은 음악적 감성이라고는 한 톨도 없던 나로 하여금 ’듣기만 해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이 슬픈 기타‘라는 대단한 감상평을 남기게 해 주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전자기타가 아닌 기타는 다 그런 소리가 나는 줄 알았다. 여기서 이렇게 알뜰하게 아는 척하며 써먹다니. 역시 사람은 두루두루 알아 놓아야 해. 나는 으쓱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멋있다아아! 세상에, 그걸 취미로 배우러 간단 말이에요? 원래 공부는 어디서 했는데요?”

“영국이요.”

“어머? 영국 유학생이에요? 어머,어머,어머!! 그럼, 기타 배우다가 다시 영국 가요? 공부하러?”

“공부하러 가는 건 아니구, 영국에 이제 일자리가 생겨서요.”

“어머, 외국인이 취직하는 거 진짜 어렵잖아요. 자기네 나라 대학생들도 다 실업자인데, 유학생들한테 일자리 주는 거는 정말 완전 뛰어나야 준다던데? 오빠 완전 대박이네요?”


내 주둥이에서는 간사해보일만큼 오빠에 대한 칭찬이 자꾸 튀어나왔다. 이 모든 칭찬은 자발적인 것이지만, 3 유로(Euro)도 안 해 보이는 토마토 바게트 덕분이다.


“아니에요.”

“이러지 마세요, 우리 오빠가 미국에서 공부해서 아는데, 외국 학생들한테 그 나라 일자리 잘 안 줘요. 우리 오빠는 거기서 졸업만 해도 다행이거든요. 엄마가 제발 졸업만 해가지고 오라고 얼마나 비는데요. 오빠, 너무 겸손하면 재수 없어요. 헤헤.”

“성격이 밝으시네요, 지원씨.”

“어? 내 이름 ‘지원’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티켓에 있었어요. 하하. 저 또 이상한 스토커 되는 건가요?”


오빠는 선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미소였다. 나는 의자에 반은 녹아 있는 이 육신에, 반만 깨 있는 것 같은 뇌 상태로는 오빠의 저 미소에 대해서 저항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말문이 닫혔다. 녹아내리면 안 된다. 단단해져야 이 밤이 편하다. 이 밤만 지나면 우린 또 볼일 없을 사람들, 즐거운 마무리를 마치고 잠을 청하자.


“화 푸세요. 제가 그렇게 콕 찝어서 스토커라고 한 거 아니잖아요? 호호.”

“알아요. 저도 농담이에요.”

“아까는, 제가 TGV 예약할 때, 유레일 패스(외국 여행자들에게 유럽 전역의 기차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티켓) 없이 기차표를 너무 비싸게 사서 손 떨려서 그런 거예요. 좌석이 없어서 1등석 끊었거든요, 그래가지고 그거 없어질까봐 노파심에 쪼잔하게 굴었어요. 파리에 소매치기 많잖아요.”

“소매치기 치고는 제가 너무 티 나게 표를 달라고 했죠.”

“그러니까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저 농담이에요.”


나는 오빠를 다시 쳐다보았다.


오빠, 오빠는 맞겠지? 보통 이정도 생겨주면 우리과 2년 선배정도 되 보이는 세련된 사람이다.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떠나 자기에게 어떤 모습이 제일 어울리는지 잘 아는 나이. 나이가 주는 세련됨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루아침에 얻을 수 없다. 막 다룬 듯, 세련된 흐트러진 머리카락들은 명민해 보이는 얼굴과 100% 어울렸다. 그 뿐인가. 함께 수다를 떨면서 나도 모르게 ‘호의적’으로 바뀌게 된 데에는 그의 목소리가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오빠의 목소리는 ‘러셀 크로우’의 미친 중저음처럼 섹시하진 않았지만, ‘매튜 매커너히’를 찜 쪄 먹고 말 것 같은 명민함에다 ‘크리스천 베일’의 허스키 보이스를 훔쳐온 것 같은 묘한 섹시함을 가지고 있었다. 난 그렇게 오빠한테 갖은 점수를 다 주고 있었다. 안 돼! 어서 차분하게 ‘부질없는’질문이나 해봐! 정신을 바짝 차리자! 나는 안전하게 시간을 보내면 된다. 그는 처음 만난 사람, 우연히 기차의 앞 뒤 좌석을 배정받은 사람일 뿐이다. 외로운 하이에나처럼 처음 보는 남자한테 혹 하지 마란 말이다.


“오빠는 스페인 가봤어요?”

“아뇨, 저 처음 가는 길이에요.”

“어머, 그런데 다 알았구나. TGV가 스페인으로 안 가는 것도 알고.”

“하하. 지원씨 말대로 저는 유럽에 사니까요.”

“스페인어도 해요?”

“아주 조금.”

“어머, 저 스페인어 전공인데 스페인어로 말 하는 거 완전 무섭거든요? 오빠, 어디 가실 때, 저 좀 데리고 다니세요. 같이 여행 다녀요.”

“여행을 같이요?”


오빠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머, 이 사람 봐. 이런 걸 빈말이라고 하는 거야. 정색을 하는 오빠를 보고 조금 놀리고 싶었다.


“네, 제가 바르셀로나 놀러갈게요. 놀아 줄거죠?”

“음……, 되면요.”

“뭐야, 이럴 때는 ‘네’라고 경쾌하게 승낙해주는 거 아니에요? 빈 말이라도.”

“…… 빈 말이 듣고 싶으세요?”


아니, 이럴 수가. 오빠 알고 보니 고지식한 모범생이구나. 앞 뒤 안 가리고 컨텍스트 그대로만 받아들이는 이과생인가. ‘좋은 게 좋다’를 못하는 ‘사육신 코스프레’가 취미인가. 적당한 인사말정도는 구별하는 게 사회성이라고 보거든요? 나는 오빠를 놀리기로 했다.


“에이, 빈 말이 듣고 싶겠어요? 시원시원하게 ‘그래요, 같이 가요.’하는 게 사회 생활하는 데도 더 좋다는 말이에요.”

“지원씨.”

“네.”

“지원씨가 온 다고 하는 말만 믿고 내가 기다리게 되면요? 그것은 그냥 사회성을 더 기르기 위해서 제가 견딜 몫인가요?”

“너무 무겁게 받으시는데? 헤헤, 알았어요. 근데,저는 간다고 하면 가요. 아무한테나 놀러간다고 안 해요. 오빠 이메일, 연락처, 아니다. 먼저 이름이 뭐에요?”


나는 신난 듯 몸을 크게 구부려 발치에 있던 내 가방을 끌어 당겼다. 안 그래도 헤어질 때쯤에는 어디서 뭐하는 사람인지 이메일 정도는 받으려고 했다. 좋은 사람이었고, 큰 도움을 받았으니까. 메모지가 아니라 일기장에 적어도 될 만한 구세주였다. 오빠는 이 겨울 유럽여행에서 만난 내 첫 번째 친구니까, 제가 꼭 바르셀로나 방문하겠습니다. 빈말이라고 겁먹지 않으셔도 되옵니다요! 졸지에 빈말만 하는 여자가 되어버린 이 누명도 씻고 바르셀로나도 안 심심하게 여행하고 나야 밑질 거 없습니다요!! 내가 신명난 모습으로 가방을 뒤지자 오빠가 조심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부담 갖지 말아요. 마드리드 가서 할 일 하다보면, 거기서 친구들도 사귈 거고, 거기서 어디 가자고 할 거고, 그럴 때는 그거 다 따라가세요. 나랑 어디 가야 된다면서 그럴 필요 없구요.”

“그거 다 알아서 하죠, 오빠, 이름이 뭐라고요?”

“이상호.”

“상호오빠? 오, 좋아. 이메일하고, 전화번호하고 모바일도 여기, 영국 것, 다 모조리 다 쓰세요.”


나는 포스트잍을 내밀었다. 오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의 가방을 당기더니 작은 볼펜을 하나 꺼냈다.


“진짜 다 쓰셔야 되요. 집 주소, 핸드폰, 이메일, 집 번호도! 나 바르셀로나 갔는데 오빠가 나 바람 맞출 수도 있잖아요, 집에 전화해야지.”

“서프라이즈로 오는 것만 아니라면 바람 맞추고 그러지 않아요.”

“미리 알려 드릴 테니까 어서 영국 것도 모조리 잽싸게 써 두세요. 나를 빈 말만 하는 여자로 본 죄가 있으니까내가 가면 나랑 꼭 놀아줘야 해요. 나는 반드시 바르셀로나에 갑니다. 오케이?”

“하하하. 안 졸려요?”

“오빠는요? 오빠 졸린데 내가 계속 말 걸었구나.”

“그런 건 아니에요. 아까 비행기에서 내렸댔잖아요. 드골 공항에서 바로 왔다면, 저녁 비행기로 온 것일 텐데. 피곤하지 않아요?”

“못 자겠어요. 스페인 국경에서 갈아탄다면서요. 그거 놓치면 어떻게 해요, 또 국경 갈 때까지 내 가방 누가 가져갈 수도 있고.”


오빠가 우리의 열차 칸을 둘러보았다. 아이쿠. 여기는 우리뿐이구나. 가방 드립은 의도치 않게 오빠를 또 소매치기로 모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누가 타면, 오빠 말고요.”

“하하, 알아요. 근데, 중간에 한두 번 서는 역에서도 새벽에 도착하는 거라 그렇게 많이 타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가방은 걱정할 만큼 위험하진 않을 건데……. 내가 깨워줄게요. 자고 있으면 내릴 때 되어서 알려 줄게요. 눈 좀 붙여요.”

“오빠는 안자요?”

“저는 아까 기차 타기 전까지 많이 자 뒀어요. 유럽에 사는 사람답게.”


이게 무슨 횡재인가. 나 그럼, 맘 편히 자도 돼? 이 어두운 기차 안에서. 내 짐 걱정 안하고 그냥 자도 된다, 이 말인가? 내가 너무 무장해제 되어버렸나. 저 말이 어째서 하나도 의심가지 않는가.


“진짜요? 오빠가 저 깨워 줄 거예요?”

“네. 가방도 지켜줄게요. 그러니까 지금 그 백을 베게로 배고 캐리어를 여기로 당겨서 발을…….”


오빠는 내 어깨를 잡고 내 가방을 베게로 넣어주려고 했다. 어깨를 잡은 손의 감촉이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오빠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Sorry. (미안해요.)”

“하하하. 뭐요, 여기 이렇게 누우란 거죠? 내 캐리어는 여기로 끌어 놓고?”


나는 애써 깔깔거리며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알아서 몸을 누였다. 세상에서 제일 좁고 아늑한 침대가 완성되었다. 내 어그(Ugg) 부츠가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지만, 내 머리는 폭신한 태국산 민속 가방에 곱게 처박혔다. 오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그 미소는 묘하게 설레는 미소였다. 저 미소의 주인은 믿을 만하겠지, 특별히 의심할만한 사람은 아니었어. 나는 스스로 내가 믿는 것이 당연하다는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오빠를 의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없어 보인다, 의심하는 게 바보다. 내 눈은 천천히 감기려고 했다.


“잘 자요. 걱정 말고.”

“나 두고 혼자 내리면 지구 끝까지 쫓아갈 거예요.”

“하하. 영국으로 찾아오면 되겠네요.”

“근데 오빠도 졸리면 자요.”

“네.”

“Good Night“

“Gute Nacht (‘굿 나잇‘의 독일어)“


그 때는 왜 이 사람이 독일어로 인사하는지 어렴풋이 궁금했다. 그런데 나는 되묻지 않았다. 자라고, 봐 준다고, 지켜준다고. 안심시키는 그 말에 마술이라도 걸어 놓은 것처럼 나는 그 간단한 말을 듣고서 눈꺼풀이 절로 감겼다. 그래서 왜 스페인어도 아니고, 불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독일어로 ‘잘 자’라는 것인지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만약 그 때, 그게 독일어냐고 되물었다면 나와 오빠는 어떻게 되었을까. 밤을 새며 이야기꽃을 피웠을까. 지금처럼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가끔 그 긴긴밤을 떠올리면서 오빠를 기억하곤 한다. 그 때 오빠는 분명히 'Gute Nacht'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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