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즐거웠던 일은 자유로 드라이브 하다 우연히 들린 금촌 통일 시장.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재미있는 재래시장을 발견했다. 복순이도 만족한 새로운 기분의 여행이었음.
오늘 슬펐던 일은, 넷플릭스 D.P 를 봐버린 것. 앉은 자리에서 한 봉지를 다 먹어치우는 노래방용 새우깡처럼 멈출수가 없었다.
어릴적부터 친한 오빠 하나는 구정고등학교를 나왔다. 요즘의 집값 때문에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그는 친척이 좀 유명한 축에 들 뿐이지, 뭐랄까 오금이 저릴만한 금수저는 커녕 그저 중산층 가정이었다. 다만, 하필 초,중,고등학교 모두, X세대, 오렌지족의 발산지, 압구정이었던 것이 그 옛날에도 (오, 라떼는 말이야 하기 싫은데) 자기소개에서 화자되곤 했다.
나는 그와 꽤나 가까웠던 사이였지만 가끔 들어주기 참 곤혹스럽다고 느꼈던 것이 '군대'이야기였다. 오빠는 늘 '오빠인척' 하는 걸 즐기느라 온갖 조언과 도움을 주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참 미안했는데,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맥락도 없이 튀어나오던 것이 '군대'였다.
"검은 머리 잘해주면 안 된다. 사람 너무 쉽게 믿지 마. 너는 나랑 좀 비슷해서..."
"네에. 알아서 잘 해요."
"야, 너도 순진해서 다 너 같은 줄 알아서 걱정이 크다. 내가 '군대'에서..."
롱스토리 숏 요약하자면, 오빠의 패착은 군대에서 본인이 어느 동네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고, 지금은 뭐를 하다가 군대에 오게 되었는지 등등을 솔직하게 말한 것이라고 했다. 별 경계심이 없었다고 했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건가 싶었다고 했다. 본인은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사실 나도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휴가때 압구정 어디를 가면 누구 불러서 그 술을 싸게 사먹으라는 둥, 본래 다정하고 사람 좋아하는 성격상, 그 모든 이야기는 악의없이, 의도없이 그냥 캐주얼한 것이었다. 본인이 본인 친구들하고 해온 그대로.
그게 꼬왔던 사람이 있었다. 오빠의 '선임'이었다.
선임은 밤마다 옆에 누으면 오빠 귀에다 대고 귓속말을 했다.
"미친년아, 잠이 오니? 미친년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오빠는 나름 쑥과 마늘을 먹던 곰보다 더 참았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리지도 않고 미친년이라고 속삭이는 통에 선임더러 샤워실로 나오라고 했다. '원뻔찌 쓰리강냉이'를 노리며 한 방 날리자,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단다.
"니가 먼저 때린거다."
쓰러졌던 선임이 뺨을 쥐고 묘하게 웃으며 일어났던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고했다.
그런데, 오빠가 사람 믿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이유는 단지 그런 함정에 빠진 경험 때문이 아니었다.
'돈 많은 압구정 사람', 오빠의 부모님들이 그 선임을 위해 많은 것을 해주었다는데, 그 때마다 선임이 고마워하긴 커녕, 그 다음에는 더 많은 것을 간접적으로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매번 이렇게 말했하고 한다.
"넌 운이 좋아서 부잣집 태어난거니까, 이렇게 해야 세상이 공평한거야. 내 덕인 줄 알아."
정해인씨가 한참 인기가 있을 때가 최근이었던 것 같은데, 암튼 그 유명한 드라마를 드라마덕후인 나는 부지 않았다. 그냥 그 드라마가 별로였다. 그래서 넷플릭스 D.P를 대단히 학수고대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가끔 보이던 D.P 예고편에서 좋아하는 배우인 구교환씨가 '깐돌이'처럼 나오는 모습이 걱정되어 (내가 실망할까봐) 그냥 안 보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앉은 자리에서 6개의 에피소드를 전부 보았다.
그리고 아주 슬프다.
당연히 슬픈 얘기고, 속상한 얘기고, 억울한 얘기다. 늘 느끼는거지만, 권선징악은 판타지고, 현실은 지옥이다. 가해자는 장난처럼 '미안하다'고 하고, 피해자는 살려달라고 몸부림쳤다. 모두 모른척했고, 결국은 자기만 손해인 선택을 해서라도 억울함을 풀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자살했다. 그의 죽음은 애도되지 못했다. 죽어서도 '관심사병에 우울증 환자'로 매장당한 임의적 결론이 뉴스를 탄다.
이 이야기가 나를 슬프게 한 것은 이 이상한 가학의 구조는 처음부터 '선임'의 자리를 꿰차는 운을 탄 자가 마음먹고 남용하면, 당해내지 못하는 구성이기 때문이다. 선임이 후임을 괴롭히고, 힘 센 선임과의 관계에서 그와 가볍게 시시덕거리느라 가학행위에 동참하거나, 아니면 가학행위를 모른척한다. 시끄러워지면 여럿 다치니까. 시끄럽게 만들었을때 선임을 없애는 일은 상당히 귀찮은 일인까. 방관하다가, 소리가 나면 좀만 참으라고 윽박지른다. 당한 사람만 손해다.
'억울하면 군대 빨리와.'
'억울하면 회사 먼저와.'
뭔가 익숙한 이야기다.
그 여자의 자격지심, 피해의식, 과대망상은 참 끝이 없었다. 가령, 다른 부서에서 쫓겨날(?) 위험에 4년동안 노출된 때, 본인의 팀장은 본인과 밥을 먹어도 4년간 한 번도 눈을 마주치거나 말을 나눈적이 없다고 했다. 나가라는 수순이었고, 당돌한 그녀는 전혀 다른 본부에 (역시 같은 그리스도교인의 도움으로) 이동될 수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 아버지는 재정상황이 별로였고, 두분다 신용불량자였나 그래서 중학교는 절에서 살고 고등학교 교회에서 살았나 반대인가 그랬다고 했다. 대학때는 '도를 아십니까' 고시원에서 살았고, 그 회사를 들어간 서른 후반이 되어서야, 잘 배우고, 잘 자란, 정말 금수저들이 제대로 보이는 환경에 노출 되었다. 똑똑한 사람이니까 무엇이 좋은 것인지 바로 감을 잡았다. 그녀는 본인의 선택이 아쉬워졌다.
"나는 더 돈이 많은 사람이랑 결혼 했어야해."
40대 중반의 여자가 무의식중에 내 뱉는 얘기치고는 상당히 진심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미혼이라는 이유로 돈 좀 있어보이는 그럴듯한 '소개팅'자리를 주자는 말이 나오면 정말 본인이 노처녀인것처럼 길길이 뛰었다. 절대 안된다며, 다른 여자후보가 있다며, 그렇게 파르르 떠는 얼굴을 보면 참 재미있었다 (여즉 이렇게 시는 건 그녀의 기도빨이 영험해서일지도).
그러면서 내게 가끔 이렇게도 말했다.
"너는 더 고생해야되. 그게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맞고 균형에 맞아. 아니면 불공평해. 나는 허무해."
"나는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너는 너무 고생을 안했어. 이건 참 불공평해.'
미쳤나 싶은 사람이었기에 거북하기만 했지만, 요즘 가끔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이코패스의 정의에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설정이 있는것을 알고 나니, 그녀의 모든 행동이 이해되었다. 하느님께서 불기둥까지 보여주시고 본인만 잘되라고 밀어주시는데, 꿈에 로또 번호 6개가 명확히 나와서 사러만 가면 되는데, 못갔는데, 이렇게 낯빛이 좋으신 대표님이 저를 사랑해주셔서 제가 부자가 될 모양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어째 자꾸 눈이가는, 자기와 다른 조건이 너무 싫었던 것이다. 적당히 괴롭혀보니 역치가 어디까지인지 감도 잡았고, 감시의 논을 피하는 방법도 알았다. 인사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대표님 직할 부서였으니, 대표님만 잘 잡으면 되는 것.
일을 처리하던 윗분이라는 사람들은 그여자가 나가면 대표들이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나더러 좀 참아달라고 했다. 나는 내가 나가더라도 사과라도 받고 싶다고 했다. 그건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 이야기가 퍼져나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CRO라는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너만 손해라고. 올무에 걸린 새가 움직일 수록 힘들어진다고. 내가 사과를 받고 싶다고 외칠수록 받을 수 있는게 적다고 했다.
D.P를 다 보고나서도 그 미친년과 함께했던 1년반이 떠오르는 걸보면, 나 PTSD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인가.
나는 위로라도 받았다.
양진호한테 맞은 직원은 잘못이 없다고. 똥 밟았으니 침 한번 딱 뱉고 갈길 가라고.
하지만, D.P 사람들은 특히 조 일병은 위로는 커녕 무엇도 못 받았다. 억울한 마음에 눈이라도 감을지 모르겠다. 사고로 위장될 뻔했던 윤일병 사건도 생각나도, 내 인생도 생각나고, 이 세상도 생각나도, 왜 사는지도 고민되는 묵직하고 슬픈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