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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 Nov 17. 2019

창문이 큰 집을 갖고 싶어요.

 나의 꿈은 나무가 내다보이는 큰 창문 앞에 앉아 사색하는 할머니 되기이다. 

배경에 요정들이 돌아다니는 북유럽 숲 속이나 호수가 아름다운 캐나다 전나무숲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앞으로 내가 이민을 가지 않는 한 그런 동화 속 같은 자연환경에서 늙어가기는 어렵지 싶다. 

 그렇게 크게 어려운 꿈도 아닌 것 같지만 이 소박한 꿈을 가로막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천성적으로 생각도 겁도 많아 무슨 일을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도 매 년 생각만 하느라 놓쳐버린 기회들이 아까워 죽을 것만 같다. 이런 겁쟁이가 어떻게 호주에서 혼자 살다 올 생각을 했는지 다시 생각해봐도 신통하다. 다시 어려진다면 대학생 지현에게 재지 말고 당장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너는 앞으로 졸업하고 통번역 대학원 시험을 보겠다는 결심은 절대 하지 말라고, 이 세상은 넓고 세상을 겪으며 배우는 게 훨씬 많을 것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인생은 왜 항상 후회 투성이인지 대학을 가겠다고 재수를 선택하고 결국 그렇게 선택한 전공이 적성에 전혀 맞지 않았으며 재학 중 겁이 나 전과를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과 동아리 활동을 꾸준히 하지 않았던 것, 하고 싶은 대외활동을 고민만 하다 시도하지 않은 일 전부 후회된다. 아, 졸업 후 별 고민 없이 수험생활을 시작했던 것도 너무 후회한다. 

 그래도 호주에서의 1년은 나의 20대 시절 중 유일하게 전-혀 후회가 없는 시간이다. 호주에서 나는 현재를 사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극심한 경쟁사회인 한국은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시장가치가 없는지 끊임없이 알려주었고 나는 주위에서 빨리 달리라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달렸다. 바보 같은 경주이다. 어디로 달리는지도 모르는 바보 경주마들이 내 주변에도 무수하다. 

 현재를 사는 법은 어렵지 않았다. 호주에서 일을 구할 때 고용주의 구미가 당기도록 이력서를 매일 고치고 아침저녁으로 인터넷 지원을 하는 와중에 발품 팔며 다섯 장씩 이력서를 뿌린다. 힘들어도 눈 앞에 과제에 집중하면 되니까 마음이 아주 괴롭진 않았다. 그렇게 노력해서 일을 구하고 나서 마음이 마냥 넉넉하고 인생이 그냥 행복해서 말 그대로 매일 미소 지은 채 길거리를 걸어 다녔다. 호주는 하늘이 왜 그렇게 파랗고 공원은 아름답고 사람들은 왜 이리도 여유로운지. 휴일이면 집 근처 미술관에 가는 게 큰 행복이었다. 전시를 보고 1층에 있는 예술 서점을 구경한 뒤 친구에게 줄 엽서 한 장을 고른다. 내일 일은 걱정하지 않고 오롯이 그 순간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내가 다시 한국에 와서 생전 처음으로 취업을 준비한다. 내가 읽어도 말이 안 되는 자소서를 쓰고 또 써도 나는 자꾸 조급해진다. 계절 변화에 민감한 내가 가을이 다 지나가도록 감흥이 없다. 내년에 나는 어떻게 될까 자꾸 스스로에게 초조하게 되묻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삶이 행복하지 않은 거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진 않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 강아지와 함께, 이제는 제법 코가 시린 가을바람을 맞으며 산책하는 일은 은은한 행복이다. 직접 요리한 소박한 점심 후 먹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시원하고 맛있어서 행복하다. 미래에 확신이 없고 불안하면서도 매일 작은 행복들이 있으니, 인생이란 게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쓰긴 해도 그 시원한 맛에 중독되는가 보다 싶다. 

 내게 내장된 행복 탐지기는 인생에서 크게 맛볼 수 있는 행복들보다 이런 작고 매끈하게 빛나는 조약돌 같은 작은 행복들을 탐지하는 데 특화되어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작고 소중한 순간들을 소중하게 주워 담으려고 한다. 내 머리가 전부 희게 물들 때까지 말이다. 아, 물론 그때는 큰 창문이 있는 나의 방에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젊은 내가 이런 생각도 했었지" 하고 홀홀 웃으며 따듯한 커피를 마시고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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