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나 내년에는 안식년 할래요.'
오늘 이 시간에 이렇게 말할 생각은 1도 없었다.
그런데 그냥 저 말이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말을 건넨 뒤, 당황할 남편에게 갑자기 미안해졌다.
그런데 남편은 흔쾌히 그래라고 말했다.
올 한 해 고생 많았다며, 내년에는 그럼 뭐 하고 싶냐고 물었다.
음.. 계획에 대해 물으니 머릿속이 바빠졌다. 내년에 그럼 나 뭐 하지?
나는 왜 안식년을 가지고 싶다고 한 걸까?
내가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고 결정하고 싶다는 생각.
이렇게 정리 없이 하루하루를 밀려가듯 살아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글을 쓰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
이런저런 생각들로 안식년을 떠올린 거였다.
그런데 남편에게는 남편이 납득할만한 또 다른 핑계를 제시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급하게 떠올린 두 글자.
운.동
운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살도 너무 많이 쪄서 걱정이고, 건강을 생각하고, 운동 습관을 가지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무조건 지지라며 안식년이라는 내 결정을 지지하고 응원해 줬다.
갑자기 경제활동을 멈추고 안식년을 보내겠다는 와이프의 결정을 응원해 주는 건
남편이 고액 연봉자여서도 아니고, 우리가 모아둔 재산이 많아서도 아니다.
물론 내가 그동안 정말 열심히 돈을 벌어왔기 때문도 아니다.
남편의 수입만으로도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감사한 상황과
아마도 내가 전생에 지구를 구한 덕에 만난 남편의 마음씨와
부양가족에 대한 무게감이 덜하다는 것 등이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의 안식년을 응원할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남편은 내가 다시는 아프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결정을 존중해 줬을 것이다.
나는 많이 아팠다.
지금도 다 나은 건 아니고, 매일 약의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지금은 그래도 살만하다.
씻은 듯이 나을 수 없는 병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감사하다.
남편은 내가 아파한 시간들을 내 옆에서 묵묵히 견뎌내 줬다.
나 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단 걸 안다.
하지만 언제나 내 옆에서 내 손을 잡아주고,
나를 일으켜 작은 일상들을 함께 해나갔다.
그래서 지금처럼 이렇게 아침 햇살에 눈을 뜰 수도,
신발을 신고 여행을 떠날 수도,
까르르 웃으며 행복해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행복이 더 단단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안식년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올 한 해를 정리하고, 내년 안식년 계획을 세워야 한다.
남편에게 미안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죄책감으로 내가 나를 힘들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가 단단해지고, 나의 행복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올 한 해 나는 어떤 것들로 힘들어했는지,
어떤 것들이 나를 웃게 만들었는지,
어떤 것들이 나를 성장시켰는지.
우선, 나의 한 해를 찬찬히 떠올려보며
2025년이라는 상자 안에 추억을 꾹꾹 눌러 담아 보관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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