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 한 글자에 나를 눌러 담는다.

by 니모

하루하루 흘러가듯 살았다. 매일매일이 별다를 것 없는 날들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문득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시간 속에 내 발자국 하나 없었다.


우울하고 힘들었다.

그런 감정을 글로 남기기 무서웠다.

종이 위에 꾹꾹 눌러써진 나의 우울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까 봐.



그러다 문득 과거를 돌아보니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우울했던 그 시절에도 분명 웃었던 날이 있었고, 무언가를 맛있게 먹은 날도 있었을 것이다.

무척이나 아파한 날도, 매우 슬퍼한 날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억이 내게는 남아있지 않다.



가끔 남편에게 묻곤 한다.

그 시절의 나는 어땠냐고.


그럼 남편은 그때의 나는 무얼 좋아했는지, 언제 웃었는지 작은 추억들을 꺼내 내게 들려준다.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이, 기록이 없기에 남편이 들려주는 과거 이야기에 놀라기도 하고, 아닐 거라며 근거 없는 부정을 하기도 한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의 저자 김신지님은 작가 소개에 이런 문장을 기록해 두었다.


"무엇이든 기록해 주세요.
매일 기록하는 사람은 하루도 자신을 잊지 않습니다.
그건 곧, 하루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과 같아요."




한때는 나도 매일 일기를 쓰며 하루를 기록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건 내가 느낀 나의 하루가 아니었다.

선생님이 매일 일기장을 검사하던 초등학생 시절에는

행복했던 일들만 일기로 남겼다.

동생과 다툰 일이라던가, 가정사라던가 지극히 개인적인 마음을 일기장에 내어놓지 않았다.

대신 즐겁게 논 일이나 읽은 책에 관한 내용들로 일기장을 채웠다.


얼마 전 본 동생의 일기장과는 매우 달랐다.

나와 싸웠던 이야기, 집에서 혼난 이야기 등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적어 내려 간 동생의 일기장을 보며

나는 내 일기장에서 조차 솔직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열어볼 수 있는 권한이 없는 나의 일기장이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누군가 내 일기장을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일기장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말이나 누군가에게 들키면 이불 킥할 것 같은 말들을 검열했다.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기록하려 한다.

무엇이든 기록하고 싶은 것들을 기록하려 한다.



예쁘게 웃는, 행복해하는 나도 기록하고,

찌질하게 서운해하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나도 기록한다.



하루를 곰곰이 되짚어보며 기록하고 싶은 것들을 골라낸다.


먼 훗날 요즘의 나를 돌아봤을 때,

지금처럼 떠오르는 기억 하나 없이 헛헛해하지 않도록

나의 인생을 촘촘하게, 좀 더 녹진하게 살아가도록


그렇게 하루하루 기록하면서 나를 남긴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나를 눌러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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