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모든 일이나 만남에는 때가 있고, 그 시기가 되어야 이루어진다는 말.
나와 남편 사이에 그 '때'가 찾아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편과 나는 풋풋했던 스무 살에 처음 만났다.
스무 살의 여름, 밤바다를 보며 이야기를 나눌 때도,
비슷한 시기에 이별을 겪고 서로를 위로할 때도,
우리는 친구였다.
분명 연애로 이어질 타이밍이 있었는데도, 우리는 굳건히 우정을 지켜왔다.
대학생 때는 시험공부하다 갑자기 고백 충동이 생긴 남편이 나를 불러낸 적이 있었는데, 이런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나는 헤어팩 중이라 못 나간다 해서 연인으로 이어지지 못한 적도 있다.
이렇게 나와 남편은 오래도록 우정을 이어왔다.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우리는 그런 사이였다.
방학이면 서로 손 편지를 써서 부치기도 하고,
뭔가 고민이 있거나 마음이 울적할 때면 전화기가 뜨거워질 때까지 통화를 하곤 했지만,
우리는 친구였다.
물론 내가 연애 중이거나 남편이 연애중일 때는 서로가 조심했다.
서로의 연애 상대가 마음 불편해하지 않도록 신경 썼다.
여사친 남사친 문제로 서로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거리를 둔 친구로 지냈다.
그렇게 서로의 연애사를 지켜보던 우리는 14년 만에 연인이 되었다.
지인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너네 둘이 사귈 줄 알았어.'
우리 둘은 연애에 대해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간 나의 연애는 참 쉽게도 시작했지만, 남편과의 연애는 시작이 참 어려웠다.
사귀다 보면 헤어질 수 있는 법인데
이 친구와 헤어지면 정말 소중한 친구를 잃는 것이라 생각하니
쉽사리 우정을 사랑으로 맞바꾸지 못했다.
그러다 남편의 예상치 못한 고백으로 시작된 우리의 연애는
결국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결혼으로 이어졌다.
정말 우리의 만남에는 때가 있었나 보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 연애를 시작했고,
또 때가 되어 결혼을 해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쓰레기 같던 연애로 내가 다치고, 힘들어했던 날을 생각하면,
그때 그 여름 밤바다를 보며 사귀자고 할 걸,
그때 헤어팩 얼른 씻어내고 남편의 고백을 받으러 갈걸.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는 우리의 때가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의 연애를 하며 사랑을 배워가고, 내가 어떤 사랑을 원하는지도 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서로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알아보는 안목이 필요했다.
그렇게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적당한 때가 되었고,
이렇게 사랑이 이루어졌다.
한 때는 억지로 인연을 이어나가려 애를 쓰던 적도 있었고,
이별 후 무너져 내린 적도 있었다.
그때는 그 인연이 전부라 생각했다.
그 인연이 거기까지인 인연이었단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때의 나는 조금 덜 힘들어하지 않았을까?
어차피 지금의 남편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할 줄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때의 나는 조금 덜 아파하지 않았을까?
과거로 돌아가 내게 한 마디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어남도. 어차피 남편은 민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