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미영 Jan 02. 2023

더 이상 저희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엄마가 생사를 오가다. 


엄마 사고 이 후 한 순간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원래 중환자실도 하루에 한 번 정해진 면회 시간이 있지만 코로나19 악화 상태로 면회가 전면 중단 된 상태로 엄마의 상황을 우리가 주기적으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어떠한 상황이 생기면 연락을 주겠다는 말 뿐이었다.

병원에 제일 처음 도착했던 내가 응급실에서 부터 보호자로 등록되어 모든 것들을 지켜 보았다 보니 연락처도 나의 번호가 1순위로 등록 되었다.


엄마 사고 3일째 되던 날.

갑자기 휴대폰에 "ㅇㅇ대학교병원 중환자실" 이라고 번호가 떴다. 

면회는 불가 했지만 궁금하거나 필요한게 있으면 전화하라며 받았던 안내장에 적혀 있던 연락처를 저장해 두었었는데 그 번호가 발신자로 떴다. 

너무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 할 정도였으니, 당시 나의 멘탈은 완전 으스러진 유리 상태였다. 


전화를 받자 마자 들려 온 간호사의 첫 마디는 

"ㅇㅇㅇ 보호자분 맞으신가요? 지금 혹시 병원으로 오실 수 있으실까요?"

라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어찌 안 갈 수가 있겠는가. 못 가더라도 무조건 가야지.

그날은 일요일, 한가한 오후가 시작 될 무렵 점심시간때 쯤이었다.

일요일에 그 시간에 병원으로 와 달라는건 분명 위급한 상황이라는 걸 직감 할 수 있었다. 


" 환자분이 지금 좀 위급하셔서 긴급 수술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상황이 좋지 않아 직접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하네요. 지금 빨리 병원으로 오실 수 있으실까요?"

간호사분의 말이 이어졌다. 


코로나 상황이 장기화 되며 간단한 시술이나 일반 수술은 전화로 대부분 동의를 얻고 진행한다고 했다.

근데 엄마의 상황은 그런 상황을 넘어서는 상황이었다. 


엄마가 계신 병원과 우리집은 차로 가더라도 40분 이상 걸리는 거리다. 

급하게 달려 병원으로 도착해 전해 들은 상황은 정말 심각 그 자체였다. 


처음 사고 당시 폐에 피가 고이면서 응급으로 그 피를 제거 했었는데 

갈비뼈가 1번~10번까지 모두 부러지면서 부러진 갈비뼈가 횡경막을 찢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긴급하게 횡경막 수술과 부러진 갈비뼈를 고정하는 수술을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긴급 수술을 해야 하는데 아직 뇌출혈이 있는 중이라 마취시 사망 할 위험이 너무 높다며 마취과에서 직접 이 상황을 보호자에게 전달을 하고 서명을 받아야 한다며 호출 했다는 것이다. 


나 역시 허리디스크 수술을 2차례 하였고, 아이를 낳을 때도 응급 상황으로 수술을 했었다.

우리 아이 역시 생사를 여러번 오가며 수술 동의서 작성을 여러차례 해 보았다.

그럴때마다 담당자들을 늘 그 말을 한다.

"혹여, 생명에 지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때는 당연히 해야 하는 항목에 나와 있는 조항으로만 들렸다. 

그러나 이번 엄마 수술의 상황은 상황 자체가 다르게 다가 왔다. 

정말, 수술 도중 엄마가 돌아가실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몰려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동의서의 사인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것을....


그렇게 온 갖 동의서를 다 작성하고 수술실로 엄마를 옮길 때에도 엄마의 의식은 없었다. 

눈을 떠 보이지도, 나를 바라봐 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수술실로 엄마를 들여 보내고 홀로 수술대기실에 앉았다. 


울산에 있는 오빠가 오기도, 영천에 있는 아빠가 오기에도 시간이 어중간했다.

수술은  1시간반 정도면 끝이 난다고 했기에 멀리 있는 가족들이 오기엔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일요일 오후에 긴급하게 진행된 수술이다 보니 수술 대기실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수술 현황판에 적힌 엄마 이름을 보며 멍 해졌다.

슬픔인지, 두려움인지, 공포인지... 

알 수 없는 온 갖 감정들이 오가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현황판에 적힌 엄마 이름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수술 대기중 > 수술 중  > 회복 중 > 종료 라는 진행 사항이 나왔지만 

엄마는 수술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전화가 울렸다. 

다른  출구를 통해 중환자실로 바로 올라 오셨다고 중환자실로 오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환자실에서 엄마를 마주하였다. 

아직 마취에서 깨지 않으셔서 의식 없이 축 쳐져 있으셨고 

여전히 여러개의 기계와 링거를 달고 있으셨다. 

한 마디로 온 몸이 만신창이 처럼 보였다.


담당 선생님 말씀으로는 수술은 잘 끝났다고 하셨다.

부러진 갈비뼈는 핀으로 고정을 했고, 뇌출혈도 더 진행되는게 보이지 않는다며 일단 지켜 보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참을 울며 왔다. 



엄마 수술이 있고 5일 후.

금요일 오후에 중환자실에서 또 전화가 왔다. 

중환자실에서 환자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다 달라는 연락이었다. 

회사 근무를 마치고 병원으로 가는길. 

병원에 거의 도착 했을 때쯤 또 중환자실에서 전화가 왔다.

담당선생님께서 면담을 좀 했으면 한다는 거다.

병원에 다 왔으니 뵙자고 전달을 하고 중환자 실로 갔다. 


그리고 수술을 담당 했던 흉부외과 선생님을 만났다.

한참을 망설이던 선생님은 이윽고 말을 꺼내셨다. 


"어머님 지금 상황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보통 이정도 다친 경우 젊으신 분들은 벌써 몇 일 전에 깨어났어야 하는 상황이고, 어머님이 연세가 아무리 있으시지만 너무 못 깨어나고 있으세요.

뇌출혈도 잡혔고, 갈비뼈 수술도 다 잘 되었고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상황인데 어머님이 지금 의식이 없습니다. 이만큼 시간이 흘렀는데 의식이 없으시다는건 깨어나기 힘들다는 겁니다. 

CPR(심폐소생술) 포기 각서 작성하시고 요양원으로 옮기셔야겠어요. 

더 이상 저희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


'어? 뭐라고? 포기 각서? 요양원? 할 수 있는게 없다고?'


나의 머릿속에는 이 몇 단어만 스칠 뿐이었다.

할 수 있는게 없다니.. 엄마가 깨어나지 않는다니.. 


아무말도 하지 못 하고 눈물만 흘렸다. 

엉 엉 울지도 못 했다. 흘러 내리는 눈물은 마스크 안에서 콧물과 범벅이 되어 흥건 할 뿐이었다. 


"이런 중대한 문제를 제가 혼자 결정 할 수 있는건 아니구요. 가족들이랑 우선 상의 잠깐 해 볼께요" 라고 말씀을 드리고 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이 상황을 전달 하려 했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은 주체 할 수 없었고 먹먹해 오는 마음을 감 출 수 없었다. 


일단 아빠와 오빠가 담당선생님을 직접 뵙고 이야기 하기로 했다.

일요일 오후에 병원에 나올꺼라며 담당선생님은 그 날 그럼 결정 하자고 하셨다. 


그리고 돌아 오기 전 엄마를 다시 뵈었다. 

아무런 미동도 의식도 없었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건내지 못 했다. 

그저 손 한 번 잡아 볼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머리 속에는 엄마의 모습과 선생님의 더 이상 할 수 있는게 없다는 말만 맴돌 뿐이었다. 

그렇게 한 참을 울었던 날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중환자실에서 마주 한 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