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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Nov 21. 2019

나뭇잎 같은 시간들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장애인 친구를 만난 적이 없다. 중학교 때 반장의 오빠가 지적 장애가 있다는 소문만 들었을 정도다. 친구 아버지는 아들의 존재가 집안의 수치여서 학교에 안 보내고 집에서만 지내게 했다. 어느 날 집에만 갇혀있던 오빠가 발가벗은 채 온 동네를 뛰어다니는 사건이 생겼다. 그날 이후 반장은 급격히 말수가 줄었고 그 일이 없던 것처럼 반장을 대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브린 브라운은 수치심이란 단절에 대한 공포라고 말한다. 나의 약점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나와 관계를 끊을지 몰라 두렵다. 수치심은 취약성에서 비롯되기에 우리는 완벽해지려 애쓰고 부모는 아이의 불완전함을 고치려 하고 숨긴다. 그런데 취약성에는 놀라운 힘이 있어서 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진정한 기쁨과 사랑, 창의성, 소속감의 원천이 된다. 반장의 아버지가 “이대로 충분해, 너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어.” 하는 용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한 사회의 성숙도는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가늠할 수 있는데 우리 사회는 분리, 단절시키고 격리, 축소하는 방식으로 해결해 왔다. 초등 시절부터 아이들은 교과서 지식보다 사회와 삶 속에서 더 강렬한 배움을 얻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인 부모나 교사와 같은 어른들이 우리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예민하게 감지하며 자신은 앞으로 어떤 태도를 갖고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결정한다. 내 어릴 적 어른들은 외면했지만 어른이 된 지금 대답해야 할 상황을 맞이했다. 학급에서 민수(가명)를 만난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좋아하고 만 단위 이상 큰 수를 잘 아는 민수는 시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귀여운 아이다. 박자 감각이 좋고 잘 웃는 민수를 사람들은 그저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고 부른다. 의사소통과 사회적 상호작용이 어려워 수업 활동에 잘 참여하지 않고 수시로 “지금 몇 시야?” 묻지만 친구들은 그런 민수를 자상하게 돌봐 주고 챙겨주었다. 통합학급에서 아이들은 모든 것을 해주지 않되 필요할 때 도울 수 있는 알맞은 거리를 체득하는 지혜를 배운다. 개별화 수업 갈 때 민수가 훌쩍이며 안 가려고 하자 친구들이 달래서 복도 끝에서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에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언젠가 책을 읽어주는데 듣고 있지 않는 것 같던 민수가 아파트 10층을 걸어 올라갔다는 부분에서 “(계단 올라가면) 힘들어.”라고 툭 던졌을 땐 다 같이 웃었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민수로 인해 우리 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자주 느낄 수 있었다. 학예회, 운동회, 체험학습, 급식시간 등 ‘민수 입장에서 어떨까?’ 하는 배려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민수를 보듬는 따스함이 교실을 훈훈하게 덥히면 우리들 사이에는 조용한 자부심이 차올랐다.


민수의 담임이 되면서 학교의 의미를 새삼 고민하던 중에 도종환 시인의 <나뭇잎 같은 사람 많다>가 생각났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은 ‘눈에 뜨이는 화려함이나 돋보이는 빛깔 같은 것을 지니지 못한 나뭇잎’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시간을 통해 ‘평범한 이파리들이 가장 오랫동안 나무를 떠나지 않고 나무와 함께 있으면서 기쁨과 고난과 시련을 같이’ 하듯이 민수와 친구들은 함께 하고 있다. 그런 나뭇잎 같은 나날들이 모여 우리 모두의 삶에 든든한 숲을 드리울 것이라 믿는다. 



[경향신문-학교의 안과 밖] 칼럼으로 실은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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