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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Nov 28. 2019

태연했던 그날

툭.툭.툭. 문을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여닫이 창호문이 조금 움직인다. 방문 안쪽에 달린 걸고리가 흔들린다. 고리가 헐거워서 조금만 세게 흔들면 금방이라도 열릴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의 힘도 없다. 겨울바람이었을까? 차라리 바람이었으면... 다시 문을 잡아 흔든다. 툭.툭.툭.  

  

-아야 문 좀 열어다오.

-안돼요. 빨리 가요.    


어느 매서운 겨울날 끝내 모질지 못한 누군가가 고리를 푼다. 여닫이 창호문의 한쪽이 문틀을 따라 힘겹게 열린다. 반쯤 접힌 허리와 굽은 무릎으로 문지방을 겨우 넘어선다. 방 안으로 깊이 들어오지 못하고 가까운 벽에 기대앉는다.     


휴우- 할머니는 이제 좀 쉬겠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쉰다. 이가 없어 말려 들어간 입술을 따라 나무껍질 같은 볼이 쑥 들어간다. 처음부터 갖고 태어난 문양처럼 깊게 팬 얼굴 주름을 가까이서 보자면 학교에서 배운 삼각형, 마름모, 사다리꼴... 갖가지 도형을 밤이 새도록 찾을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새벽 장사로 집을 비우면 어두운 집에는 할머니와 다섯 형제만 남았다. 밤이 되면 할머니는 안방을 찾았다. 어릴 때 살던 곳은 갈라진 틈을 시멘트로 덕지덕지 채운 낡은 한옥이었다. 겨울이 유난히 매섭던 그 집에서 할머니 방은 녹슨 대문 바로 옆이었다. 벽지가 없고 형광등조차 잘 들어오지 않는, 방바닥에 연탄보일러 배관도 없던, 방이라기엔 광에 가까운 곳에서 할머니가 지냈다.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할머니 방 앞을 지나쳐야 한다. 나는 앞만 보고 빠르게 지나쳤다. 보지 않아야 그나마 죄책감이 덜했다.     


자주 술에 취해 볼품없는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가부장의 어머니 아닌가? 아니, 어쨌든 현재 늙고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멸시받고 있었다. 나는 명치가 아렸다. 과거에 어떤 잘못을 해야 나이 들어 가족에게 저렇게 취급받을까. 내 머릿속은 엉켰다. 부모님을 의심했다. 내 존재의 뿌리가 이토록 냉정하고 몰인정하다니... 존재가 짐이 되는 인간관계의 무서움, 가족도 따뜻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공포로 다가왔다. 어린 나는 할머니를 구할 수 없었다. 찬밥이나 남은 반찬을 갖다 드릴 때 몰래 더운 밥을 한 덩이 얹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주 가끔 집에 아무도 없으면 할머니 방에 들어가기도 했다. 할머니의 고약한 냄새를 참아가며 나뭇가지 같은 팔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단지 마음의 무게를 덜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어머니와 할머니 사이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이 있었다. 젊은 날 할머니는 매운 시어머니였다고 했다. 몸이 약했던 어머니가 아들 귀한 집으로 시집와서 내리 딸만 낳았다고 온갖 구박을 받았다는, 흔한 그 시절의 이야기는 삶 속에서 얼마나 잔인하게 파국을 남기는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왜 유독 나에게 많이 남아있는지 가끔 헤아려본다. 나보다 오랜 시간을 할머니와 보냈던 세 명의 언니들도, 할머니가 그토록 원했던 남동생도 할머니를 기억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할머니에게 감정을 이입한 건지 모른다. 집에서 할머니가 가장 약했고 다음은 내 차례여서 그랬던 것 아닐까. 하루 벌어 하루 살아야 하는 가난했던 시절은 우습게도 가족 안에서 서열을 의식하게 만들었다. 가난은 참 징글맞게도 물질의 결핍에 그치지 않고 정신까지 피폐하게 해서 한 여자아이의 정체성을 침범하곤 했다. 지긋지긋했던 가난은 비정상을 정상화했다. 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른에게 먹다 남은 밥을 갖다주고, 오고가는 말의 반이 욕이어도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할머니의 말로는 가난이라는 죄를 지은 가족의 형벌을 대신 받아낸 조리돌림이었다.     


할머니가 아흔셋으로 돌아가신 날, 처음 본 고모들이 찾아왔다. 할머니 방문 앞에 서서 고모들은 곡하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아이고아이고- 느리고 규칙적인 곡소리가 리듬을 타고 내 귀로 파고들었다. 그때 연탄 더미 위에 올려둔 고모의 핸드백이 떨어졌다. 고모는 아이고아이고- 하면서 잽싸게 핸드백을 주워 올렸다. 처음 본 아저씨들이 땀을 뻘뻘 흘리더니 웃통까지 벗어들고 기운차게 하얀 천으로 요리조리 할머니를 꽁꽁 싸맸다. 상조회사 아저씨들을 수발들던 어머니는 그날따라 활기차 보였다.     


어제까진 아무도 할머니를 찾지 않았는데 오늘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할머니는 이 사람들이 반가울까? 사람들로 겹겹이 가려진 사이를 비켜가며 할머니를 보았다. 질끈 감은 눈, 움푹 들어간 볼, 핏기 없이 앙 다문 입술... 할머니는 눈만 감았을 뿐이지 듣고 있어서 이 소동을 다 아는 것 같았다. 할머니- 부르며 어깨를 흔들면 금방 일어날 것만 같았다. 열두 살의 내가 할머니를 깨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던가?    


-이 생에서 그동안 마음고생, 몸 고생 많았어요. 저세상에서는 부디 가족 아니고 모르는 사람으로 만나요.     


함께 있을 땐 내내 가슴이 아렸는데 돌아가신 날은 이상하게 담담했다. 더 대범하게 남동생을 꼬드겨 집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캐치볼을 했다. 뭔가 큰일이 일어나도 그렇게 태연하게 행동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처럼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버지는 험한 눈으로 야단을 쳤다. 

-정신이 있어?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이 나쁜 놈들.    


어머니는 우리를 두둔했다. 

-애들이 뭘 알아요? 몰라서 저러지...    


그날 저녁, 언니들은 나를 불러서 이럴 땐 우는 거라고 가르쳤다. 이제 할머니를 영영 못 보는데 안 슬프냐며 그 나이의 논리로 감정을 설명해주었다. 나는 정상인으로 보이고 싶었는지 그제야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 한편으로는 할머니가 떠나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마음이 편했던 것 같기도 했다.     


할머니의 흔적은 빠르게 지워졌다. 도배와 장판을 바르고 온기를 찾은 문간방은 이듬해 고3이 되는 큰언니의 방이 되었다. 책상이 들어가고 옷장이 생기자 광처럼 보였던 방도 예전의 주인을 잊은 듯했다. 영원할 것 같던 코를 쑤시는 할머니 냄새도 옅어졌다. 하지만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늘 그대로 또렷이 남아있다. 나는 추억도 아닌 그것을 내 안에 품고 살아간다. 태연했던 그날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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