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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Dec 07. 2019

나의 중학 시절

열 살 무렵 나는 턱을 괴고 대문 밖 골목을 내다보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왜 이리도 시간이 안 가는가. 환하게 내리쬐던 한낮의 햇살조차 귀찮게 느껴졌고 하루가 유난히도 길고 길었다. 그러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하루가 좀더 짧아졌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부딪힌 난관은 지각과 용모에 관한 생활규정이었다. 등교 시간이 지나면 칼같이 지각생의 이름을 수첩에 적던 선도부원들 옆에는 학생부장 선생님이 함께 있었다. 매서운 눈매를 가진 그 선생님은 학생들의 머리 길이를 일일이 점검했다.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가 단정하지 않으니 머리를 풀고 다녀야 하고, 머리 길이는 어깨에 닿지 않아야 된다는 말도 안 되는 규정이 있었다. 유난히 아침잠이 많고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가진 나에게 아침 시간은 전쟁이었다. 그렇게 하루의 시작부터 법석을 떨고 교실에 들어서면 자율학습부터 7교시까지 각 과목 선생님들이 시간마다 바뀌면서 들어오고 나갔다. 생각이 많아지고 감정의 기복도 심하던 때여서 그런지 집으로 돌아오면 항상 녹초가 되었다. 학교 다니는 것 외에는 달리 하는 일도 없었는데 잠은 아무리 자도 모자랐고 몸은 언제나 피곤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달라진 것은 매일 도시락을 갖고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겨울부터 이른 봄에 가지고 다녔던 보온 도시락은 세 개의 통으로 분리되었다. 바닥에 납작한 플라스틱 국물 통이 있고 그 위에 몸통이 스테인리스로 된 원기둥 모양의 밥통이 올라갔다. 맨 위에는 칸이 두 개로 나뉜 반찬통이 있어 자연스럽게 1식 2찬의 소박한 밥상이 되었다. 바닥부터 거꾸로 된 U자형 지퍼를 열고 뚜껑을 돌리면서 무엇이 들었을까 마음이 설레곤 했다. 어느 날의 도시락은 북엇국에 진미채볶음, 메추리알조림이었다. 양념이 짙은 반찬은 쿠킹 포일로, 국물이 있는 반찬은 랩으로 꽁꽁 묶어서 싸준 어머니의 꼼꼼함 덕분에 도시락에선 한 번도 국물이 샌 적이 없었다. 4교시가 끝남을 알리는 종소리와 동시에 부리나케 의자를 돌리고 책상을 모아 자리를 만들었다. 쉬는 시간에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친구들과 재잘대며 가져온 반찬통들을 가운데 모아놓으니 나름 그럴듯한 식탁이 되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밥통을 감싸 쥐고 여럿이 둘러앉아 먹으니 더 맛있게 느껴졌다. 친구들과 밥을 나눠 먹는 시간은 고된 학교생활을 버틸 수 있는 단순한 행복을 주었다. 돌아보니 그때 처음으로 휘게(Hygge)를 경험했던 것 같다.

 

휘게(Hygge)는 편안함, 따뜻함, 아늑함, 안락함을 뜻하는 덴마크 말이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또는 혼자서 보내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 일상 속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안락한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의미한다. 중학생 때 또 하나의 휘게(Hygge)는 드라마였다.


<머나먼 정글>은 토요일 오후 MBC에서 방영됐다. 조간신문 TV 편성표로 방송시간을 챙겨야 했던 당시에 외화는 재방송도 안 했다. 깜박 드라마 시간을 놓쳐서 못 보는 일이 생기면 안타까운 마음은 일주일 동안 이어졌다. 인터넷은커녕 케이블 방송도 없던 때라서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같은 시간대에 있으면 무척 고민했다. 신문 편성표 옆에 조막막한 소개 글을 찾아 읽으며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리드미컬한 주제곡이 흐르며 <머나먼 정글>이 시작되었고 내가 좋아하는 앤더슨 중사가 이번에는 좀 많이 나오길 바라며 브라운관 앞에 앉았다. 따뜻한 이불을 덮고 한 주간의 긴장을 내려놓으며 단 한 번뿐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군들 사이의 전우애와 병영생활이 대체 여중생의 무엇과 통했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특별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지금도 롤링스톤즈의 paint in black을 들으면 몸과 마음은 그때의 안온한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 지금은 케이블 방송에 종편 방송까지 더해져 드라마가 수없이 생산되고 있다. 게다가 인터넷으로 미드뿐 아니라 영드, 일드, 중드까지 볼 수 있고 완결된 드라마는 아무 때나 무한재생되는 드라마 풍년이다. 풍요롭다고 할 수 있지만 뭔가 많이 부족하고 아쉽다. 그 시절의 소소한 추억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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