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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Sep 04. 2024

인생을 향한 나의 선제공격

행복한 우물 안 개구리

무엇이 더 나은 삶인지 고민한다는 건 분명 헛되게 살다 가고 싶지 않은 열망 때문일 것이다. 누구라도 아무렇게나 대충 살다 죽고 싶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대충 사는 게 뭘까? 또 반대로 더 나은 삶이란 도대체 뭘까?


갑자기 머릿속에 온갖 물음표들이 가득해진다. 유명해지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다른 이에게 베푸는 것? 저마다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조금씩 다르게 살아갈 테지만, 나에겐 나의 답이 필요하다.


이전에도 종종 답을 찾기 위해 질문을 던졌고, 나름대로의 답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 번 크게 아프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삶의 가치가 송두리째 흔들린다. 우선 이전엔 우선순위에 없었던 강한 소원이 생겼다. 정말, 건강해지고 싶다. 몸도 그리고 마음도. 그렇게 나는 자꾸만 괴로움 없는 자유로운 존재를 꿈꾸게 된다.




지금의 나는, 돈 없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괴로울 것 같기에 돈을 벌고 있다. 그러나 돈을 버는 행위가 자아실현으로 이어지지는 않기에 공부를 하고 있다. 또, 혼자 있는 외로움은 감당할 수 없기에 짝을 찾아 함께 살고 있고 아프기 싫기 때문에 병원에 다니고, 상담을 받는다.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보면, 내가 해온 모든 것들이 '방어'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강한 공격을 받아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서둘러 세운 부실한 가드 같다. 나는 왜인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은 들은 적도 없는 사람처럼, 한 발자국만큼도 앞으로 먼저 나서는 법 없이 방어에만 몰두했던 것이 아닐까? 인생이 내게 둔 많은 악수들을 요리조리 피하기만 해도 바빴던 삶이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변하지 않는다면, 이런 수동적인 삶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그러니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는 먼저 재빠른 묘수를 찾아야 한다.




나는 숨차게 경쟁해 이기거나 누구를 짓밟는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그저 조용하고 평온하게 게으르고 싶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원하는 가장 높은 이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회피인가? 아니다. 포기인가? 아니다. 어릴 적부터 조용하게 혼자 책 읽는 것을 가장 사랑했고, 사람이 좋고 만남이 즐거워도 결국에는 혼자 글을 쓰는 것이 가장 나다웠다. 나는 여름에는 에어컨 밑에서, 겨울에는 난로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고양이처럼 그렇게 살금살금 살아가고 싶다. 가끔 털을 쓰다듬어주는 몇몇의 작은 관계들만 남겨놓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삶이 게으르고 편안한 상태 그 자체라면, 그저 단순하게 하루하루 열심히 편안하고 게으르게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닐까? 그저 이 안락한 삶을 위해 적당하게 벌고, 적당하게 쓰면서 말이다. 더 큰 욕심도 내지 말고, 스스로의 욕심에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나는 자유로운 삶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안하다. 끊임없이 불안하다. 나는 내가 그토록 원하던 게으른 일상을 얻어도 불안하다. 걸리는 것이 너무나 많다. 다 헛되게 인생을 소비하며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만 같다.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쫓기듯 또다시 뭔가를 해내려고 벌떡 일어선다. 불과 지난주에 나는 조급해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곧 불안해지지 않으려고 조급하고 숨 가쁘게 노력했다. 글을 잘 써보기 위해 고치고 또 고쳤다. 숨을 제대로 쉬기 위해 급히 들이마시고 또 급히 내뱉곤 했다. 


답을 찾은 것 같은데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모든 게 엉망인 곳에서 불행하다. 원하는 삶을 사는데도 만족할 줄 모르고 괴로운 내가 한심하고 싫어 또다시 고통스럽다. 




도돌이표처럼 괴롭기만 한 질문들이 끊임없이 맴돌지만, 혼자서는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다. 잠시 숨을 고르고 철학자들의 지혜를 빌려보기로 한다. 


니체는 초인의 개념을 통해 의미 있는 삶을 설명했었다. ‘초인’이 되어 기존의 도덕과 사회적 관습을 뛰어넘어 자기 자신을 창조하며, 자기 의지를 실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삶의 의미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의 의미를 창조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독일어로 Übermensch 다. 인간을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내가 사랑하는 카뮈 또한 부조리 이론을 통해 삶의 의미를 설명한다. 카뮈는 기본적으로 인생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저항하는 삶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즘에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철학자인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삶은 고통 그 자체다. 인간의 삶은 항상 결핍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잠시간의 쾌락, 예술이나 명상을 통해 일시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의지를 극복하고, 세상과 분리된 초월적인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고 보았다.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고통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최근 몹시 깊게 빠진 불교철학도 이와 비슷한 이론을 설명한다. 삶은 원래 고통스러운 것이며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른 존재와 연관된 지혜와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개념이 뒤따른다. '팔정도'라고 불리는 진리 개념도 중요하다. 세상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마음가짐과 의도, 말, 행동, 생계수단, 노력 등 모든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또 고대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와도 연결이 된다. 성찰하고 반성하며, 합리적으로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라는 이론 말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달리 표현하고 있지만 결국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인식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탐구하며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


그러니까, 그냥 잘 살면 된다. 




고작 인간이면서, 그것도 그다지 완벽하지 않은, 아니, 모든 것에서 완벽하게 완벽하지 않은 인간인데 어떻게 모든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까? 그런 의미로, '우물'은 인간이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나기 어렵다. 한국의 작은 촌구석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독일까지 왔지만 우물이다. 우리는 모두 우주라는 개념 아래에서는 결국 지구라는 우물 안에 있는 것 아닌가. 사실 우물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우물 안에서 보이는 하늘도 중요하지 않다. 그 모든 행복이 다 외부가 아니라 개구리 내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식견이 좁아 세상에 대해 잘 모르며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사람을 빗대는 말이다. 그러나 자기 잘난 맛에 취해 그 안에서 행복하다면 보이는 하늘이 한 줌이라도 이미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닌가? 이미 니체가 말한 초인, 초개구리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개구리다. 우물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어리석은 개구리들 눈에는 해탈의 개구리도 그저 게으르고 철없이 행복한 철부지다. 그러나 내면의 평화를 찾은 행복한 개구리에게 다른 이들의 시선이 신경 쓰일 일은 없다.


나의 묘수는 ‘행복한 우물 안 개구리’다. 외부의 그 무엇도 내 마음가짐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내 첫 번째 선제공격이다. 괴로운 인생아, 네가 뭐 나한테 어쩔 테냐! 내가 지금 이대로 충분히 행복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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