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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Aug 28. 2024

조급해지지 않으려고 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완벽하지 않은 인간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7월에 남동생에게 선물을 보내고, 편지에 대한 답장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혹시라도 못 받았다면 우체국에 행방 조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받았냐고 물어본 메시지에 남동생은 그냥 짧게 "받았어"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한 번 고심하여 쓴 메시지엔 “응 수고해”라고 답이 왔다. 


상처를 받았다. 고맙다는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맙다는 말조차 없어서였다. 약 2주간 선물을 골랐고, 편지는 일곱 장을 넘게 썼다. 진심을 많이 담았었다. 그래도 답장이 온 게 어디냐며 감정을 추슬렀지만 괜스레 서러워졌다. 켄은 내게 그만하면 되었다며, 잊으라는 충고를 했다. 그러나, 잊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남동생에게 아직도 궁금한 게 많았고 계속해서 남동생과 연락을 주고받고 싶었다. 그 이후에 용기 내 한 번 더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쓴 편지를 네가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 답장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렇게 기약 없이 기다리던 중에 엄마가 남동생네 부부와 또다시 트러블이 생겼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답장이 오지 않았구나.'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 가장 절실한 소원 중 하나다. 그렇기에 나는 엄마와의 긴 통화 뒤에 그저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진심이었다.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평생 배우지 못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데 이런 오해나 문제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아쉬웠고 속이 상해 또 바보같이 눈물이 났다. 내가 뭘 어쩔 수 없다는 것이 화도 났다.


단번에 모든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되길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적어도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원상 복귀된 것 같았다. 내가 그간 했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니, 힘이 빠졌다.




지난주 상담에서 사실 선생님께 많은 칭찬을 들었었다. 그 주에 처음으로 용기 내서 ‘나다운’ 일들을 제법 해냈고,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내가 마시고 싶은 것과 먹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했다.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니 어떤 해방감까지 느껴졌었다. 이 이야기를 하며 나는 활짝 웃었다. 함께 웃으며 선생님은 잘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지금처럼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용기 있게 천천히 과제들을 수행하는 것이 다시 한번 대단하다고 말해주며, 그렇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니까 조급해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많은 칭찬을 들었던 이 날 기분이 좋아져서 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사실 상담 때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잘 이야기해주지 않는 편이지만, 이날만큼은 내 안의 모든 불안과 공황이 싹 나아진 것처럼 느껴졌고, 정말이지 하늘을 날 듯 기뻐 모든 이야기를 해줬다. 그리고 정말 솔직하게 기쁜 나의 마음을 표현했다.


내가 느꼈던 것이 '기쁨'이어서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일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마치 도돌이표처럼 처음으로 돌아온 것 같다. 나는 조금 전 또다시 바보 멍텅구리처럼 어떤 사람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하고 싶은 말 한마디 내뱉지도 못하고 숨어버리는 실수를 했다. 심지어 오늘은 그 일에 얽매여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하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 벅차다. 불안하다고 죽지는 않는데, 나는 왜 자꾸 죽을 것만 같을까. 실제로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그저 불안한 것뿐이라고 약을 넘기며 마음을 다독인다.


아주 작은 일인데, 손가락에 바늘을 쑤셔 넣은 듯 견디기 어렵다.




사람들은 때때로 '열심히 한다는 것' 자체에 많은 가치를 둔다. 열심히 할 필요가 없는 일까지 쉬지 않고 열심히 한다. 결과적으로 빠르게 어떤 일을 수행하면 더 큰 보너스 점수가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경쟁에 익숙하기 때문일까? 무엇이든 다른 누구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누구와 경쟁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이토록이나 조급할까? 물론 하루라도 더 편해지고 싶다는 강한 열망 때문이겠지만, 결국 편해지기 위해서라면 조급한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빨리 낫는 것까지 열심히, 칭찬을 받고 싶어서, 완벽하게, 서둘러서 하고 있는 것 같다. 그저 열심히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낫기 위해 노력을 억지로 짜낸다. 다 쓴 치약처럼 더 나오지 않는 힘인데 끝까지 쥐어짠다. 그러니 자꾸 눈물만 나오는 것이겠지. 언젠간 짭조름하게 얄미운 눈물들도 마르게 될까. 이토록 멍청한 년!


얼마 전에 했던, 행복하기로 결심하면 행복해질 거라는 나의 믿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만 같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내게 고통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모두가 고통이다. 내 마음은 성한 데 하나 없이 상처투성이 낡은 자전거처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 같다.




사실, 한동안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극복한 이야기만 멋있게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글마저 누가 읽을 테니 완벽하게 쓰고 싶었다. 그런데 아니다. 나는 여전히 완벽과는 거리가 멀고, 아프고 힘들다. 


생각해 보면 '완벽한 인간'이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완벽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은 있다. 바로 나! 나는 너무나 모든 것에서 완벽하게, 완벽하지 못하다. 내가 나에게 박한 만큼 나는 내가 했던 그 무엇에도 완벽하다는 평가를 절대로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무언가 잘 해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망쳐버리곤 한다. 이토록 불완전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부처나 하나님 같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것이 매우 웃기고 안쓰럽다. 미친 모순 덩어리!


서투른 울부짖음에 스스로가 안쓰럽다가도, '그래, 걸음마라고 했어. 배우는 중이니까 그래.’ 라며 이번에도 아주 열심히 애써서 다독여본다. 나는 왜 또 대충 하는 법이 없나. 누가 본다고! 나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마저 열심히 하고 있나. 지긋지긋하게. 하긴 평생을 참으면서, 나를 몰아넣고 살았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걸 다 바꿀 수 있겠는가. 나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완벽하고 싶어서 그렇게 몸부림을 치는 게 익숙하다. 그러니 이제 와서 갑자기 반대로 난 사실 꽤 괜찮은 사람이라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줘도 괜찮다고 그렇게 어떻게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바로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나는 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고통에 몰아넣는다. 어떨 때는 이기기도 하고, 또 어쩌다가 지기도 하면서 그래, 이렇게 바닥에 드러누워 엉엉 울기도 하는 거다.




제발, 편해지고 싶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편하게 살 수 있을까. 글을 쓰는 와중에도 온몸에 개미가 걸어 다니는 것마냥 간지럽다. 고치고 또 고치니, 수술을 막 끝냈을 때처럼 온몸엔 힘이 없다. 그 와중에 머릿속은 시끄럽고 모든 살갗은 예민하게 벌게진 것 같다. 반복된 표현! 잘못된 맞춤법과 띄어쓰기! 게다가 잘 읽히지 않는 단어들! 오늘따라 글을 쓰는 것마저 괴롭다는 사실에, 도피할 곳 사라진 전쟁터같아 목은 타들어가고 가슴은 답답하며 이러다 미치지 않을까, 이러다 죽어버리는 것 아닐까 공포에 질려 숨이 가빠진다.


정말, 제발 편해지고 싶다. 오늘의 글은 도저히 밝게 긍정적으로 끝을 낼 수가 없다. 더 고치다간 정말로 미쳐버릴 것이다. 그래서 오늘따라 글이 엉망이다. 그렇지만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니, 이런 글도 있는 것이다. 오늘 고통스러운 글을 충분히 쓰고 나면 내일은 조금 더 편안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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