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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Aug 14. 2024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도 존중받고 싶어

존중받을 자격

살면서 우리는 종종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만 존중받을 수 있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사회는 성공, 명예, 재력 같은 외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마치 존중받을 자격이 없다는 듯 대한다. 나도 한때 그런 착각에 빠져 더 열심히, 더 완벽하게 살아 언젠가 인정받기를 원했다.


이제 와서는 내가 그때 원했던 것이 성공 그 자체였는지 아니면 성공에 따라오는 그 부수적인 모든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고찰 없이 그저 존중받기 위해, 막연하게 더 나은 삶을 위해 실체 없는 무언가를 쫓아가는 과정은 고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소소한 일상의 행복들을 포기하고 끊임없이 ‘높은 곳’을 향해 달렸다.




연기를 처음 시작했던 날을 떠올려본다. 중학교 때 전교생이 함께 관람한 연극에 정신없이 빠졌다. 무대 위에서 핀 조명을 받으며 독백 연기를 하던 배우가 그토록 멋있게 보였다. 그때, 저게 바로 내가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정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집으로 달려가 엄마한테 배우가 되고 싶다고 선언했다. 엄마는 내가 얼마간 하다 포기하겠거니 하며, 네 맘대로 해보라는 말을 했고, 그렇게 그 길로 13년을 노력했다.


내가 품었던 꿈은 무대 위의 행복이었다. 무대 위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집중하는 곳에 서 있는 배우, 그 배우가 하는 대사와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관객석. 그 소통이 내가 진짜로 갖고 싶었던 것이었다. 성인이 되어 처음 무대 위에 올랐을 때 정말 행복했다. 내가 원하던 것이 바로 이거였다고 느낄 만큼 전율이 이는 순간도 있었다. 무대에 오르는 날이 가장 행복했다.


그러다 한 번은 독립영화에 캐스팅되어 부산까지 내려갔는데, 첫 촬영이 들어가기 전, 카메라 감독이 내 얼굴을 보고 “어디서 저런 못생긴 애를 데려왔냐”고 말하며 촬영을 못하겠다고 화를 냈다. 몇 주 동안 연습한 대사는 아직 한 마디도 하지 못했는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스무 살 초반이던 나는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울었다. 마음이 어찌나 크게 다쳤던지, 이후 무대에 오를 때도 얼굴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무대 위를 내려오고 나면 자꾸만 절망에 빠졌다. 내가 했던 연기가 형편없이 느껴졌고, 사람들의 평가가 무서웠다. 사람들이 자꾸만 내 얼굴을 쳐다보며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집중이 되지 않았고, 예뻐 보일 필요가 없는 역할에도 외모에 신경을 썼다. 그러니 자꾸 실수를 했다. 무대에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다시 몇백 번이고 같은 장면을 연습했지만, 어떤 때는 무대 위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모든 순간을 망쳐버린 적도 있었다.


하필이면 이때, 어느 연극 오디션장에서 예전에 봤을 때보다 살이 많이 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 뒤에 캐스팅된 영화도 촬영 조건이 체중 감량이었다. 당시 나의 몸무게는 40킬로가 겨우 넘었다. 누가 봐도 말랐지만, 너무 건강해 보인다는 이유로 더 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두 달을 레몬물만 마시며 살을 뺐다. 탈모가 왔고 생리가 멈췄다. 그러나 겨우 2~3킬로 정도만 빠졌다. 워낙에도 먹는 것이 적은 때였다. 세 달째 레몬물만 마시며 버텼는데 결국에는 캐스팅이 취소되었다. 얼굴이 여전히 통통하다는 이유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젖살이었는데, 살을 뺀다고 빠지는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애초에 마른 사람을 캐스팅하면 되었을 텐데, 내가 너무 절박해 보여 억지로 기회를 준 게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시작된 섭식장애는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먹고 토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은 아예 먹지 않았다. 일 년에 생리를 두세 번만 하며 지나간 때도 있었다. 여러 번 쓰러졌고, 병원에 많은 돈을 썼다. 그것이 섭식장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아르바이트를 새벽부터 밤까지 하고, 연기 연습을 하고 무대에 올랐다.


무대는 어느 순간 더 이상 행복한 곳이 아니었다. 외모에 대한 집착과 연기에 대한 열등감이 점차 심해졌고, 나를 바라보며 집중하는 관객석에서 그 어떤 긍정적인 에너지도 찾을 수 없었다. 악몽을 꿨고 불면증이 심해졌다. 패배감에 젖어 세상을 미워했다. 삶의 이유라고 생각했던 장소가, 그토록 소중했던 공간이 두려워졌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무서웠다. 나는 나를 괴롭히는 방법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혔다.




배터리가 고장 난 핸드폰처럼 켜졌다가 꺼지고, 켜졌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어느새 더 이상 충전되지 않아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집에 틀어박혀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그 구렁텅이에서 꺼내준 이들이 있었다. 전화를 걸어 아무 말 없이 울고만 있으면 무슨 일인지 묻지 않고 그저 같이 엉엉 울어주던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전화 한 통에 먼 곳에서도 놀러 와 함께 깔깔거리며 술을 마셔주던 친구도,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어 처음으로 연출을 해본 작품을 아무런 대가 없이 순수하게 봐주고 조언해 준 친구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함께 독일에 와준 친구가 있다. 그녀는 내게 세상이 가장 버거울 때 찾아왔다. 혼자 잠드는 것이 무섭고 외로워져 이대로는 위험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어 고양이를 키우려고 했다. 그러나 돈이 없었고, 한 생명을 책임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월세 부담도 덜 겸, 온라인에 룸메이트를 구하는 공고를 냈다. 연습실로도 사용하려고 구한 열한 평 정도 되는 큰 원룸이었다. 사무실을 개조한 곳이라 공간은 컸지만 벽이 없이 화장실과 부엌이 달랑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룸메이트로 그녀가 왔다.


우리는 룸메이트로 시작해 어느새 엽떡을 함께 시켜 먹을 정도로 제법 가까워졌다. 어느 날엔가 함께 TV를 보다 독일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유럽을 여행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배터리가 방전된 너덜이로 삶에서 원하는 것이 그다지 없던 때였고, 그녀도 졸업 후에 독일이 궁금하던 차였다. 그렇게 여행 겸 함께 오게 된 독일이었다.




2015년 4월 1일 만우절, 거짓말처럼 도착한 독일은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는 듯했다. 길거리에 뚱뚱한 사람들이 버젓이 돌아다녔고, 맨 얼굴은 기본이었으며 진짜로 흰 양말에 샌들을 신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존재했다. 그것이 마냥 너무나 웃기고 즐거웠다. 마치 가장 예쁘게 꾸미고 가야 하는 파티장에 오물을 뒤집어쓰고 광대가 노는 모습을 바라본 것 같았다. 그래도 된다! 라며 꾸밈없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이 모든 것이 나의 강박을 깨버릴 만큼 자유로웠다.


그렇게 지내다 한국에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10년간의 영양부족으로 뼈가 매우 약해졌는지 비 오는 날 걷다 헛디뎠는데 그만 다리가 부러져 버렸다. 익숙한 구급차를 독일에서도 타보게 되었다. 그렇게 독일 어느 시골 대학 병원에서 보호자 없는 수술을 받았고 한 달이 넘게 입원을 했다. 덕분에 한국에 돌아가는 계획은 6개월이 미뤄졌다. 이후 우연히 켄을 만나게 되었다.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으리라. 다리 하나를 내어주고 평생의 짝을 만났으니 제법 괜찮은 거래였다. 


아무튼 켄과 함께하는 잔잔한 일상 덕분에 외모에 대한 강박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토를 하는 습관이 줄어들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접착제를 바른 듯 따라다니는 켄 덕분에 토할 짬도 없었고 함께 먹는 모든 식사 시간이 그저 즐거웠다. 살이 오른 내게 뽀뽀 세례를 하는 켄에게선 그 어떤 비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때로는 독일 사람들처럼 화장도 하지 않은 채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고, 점차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회사 사무실에서의 경험도 이전과는 매우 달랐다.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하고, 매출이 잘 나왔을 때 내 성과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가치를 수치화할 수 없는 예술계에서 벗어나, 돈과 숫자로 평가되는 세계는 오히려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다른 누가 뭐라 하든, 나의 성과는 숫자로 깨끗하게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잘할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반가웠고, 즐거웠다. 어떤 옷을 입고 가든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못생겨서 못 나가는 일도 사라졌다. 또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누구도 나더러 살이 쪘다느니 빠졌다느니 하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게 그토록 편했다. 어느새 나의 가치는 더 이상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지 않았다. 외모 강박으로 인해 밖에 나가지 못했던 날들도 사라졌다.




사실은 한국이어서, 독일이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어떤 한 가지에 매몰되어 있으면 주변을 둘러볼 수 없었던 것뿐이다.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볼 것이고 무엇을 받아들일지가 중요하다. 지금의 나는 한국에 방문해도 남들의 시선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동통한 배를 자랑스럽게 내밀고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내가 있고 싶은 장소에 깔깔거리며 존재한다. 독일에 오면서 다른 곳을 볼 기회를 얻은 것은 맞지만 중요한 것은 나 자체였다.


물론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순 없다. 나는 여전히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눈치를 보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는 더 이상 토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제는 나를 그래도 제법 존중하게 되었다.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도, 내가 꿈꾸던 그 모습이 아닌데도 나는 나를 존중한다. 연기하던 시절보다 20킬로 가까이 쪄버렸고 나이도 10살이나 더 먹어버린 아줌마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때보다는 제법 행복하니까 그것으로 충분하다.


꼭 무엇인가가 되어야만 존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높은 곳’!! 그곳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면서 그 높은 곳에 닿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타인에게도,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존중에는 조건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내가 그 무엇이든 나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누구나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이 존중은 내가 그토록 신경 쓰며 괴로워했던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존중은 나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우리는 때때로 진리를 먼 곳에서 찾으려고 한다. 이미 모두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문장이지만, 언어에 갇혀서 유행가 가사처럼 흥얼거리고 넘겨버리고 만다. 유행가 가사도 제대로 찾아서 시처럼 읽으면 깊은 사유가 담긴 것들이 있다. 어떤 노래를 곱씹으며 듣고 진짜 내 것으로 만들지는 각자의 몫이다.


독일에서도 간혹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고, 그렇기에 타인도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나는 화가 나거나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깝다. 내가 그랬기에, 내가 세상을 그토록 미워했기에 알 수 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그 기준에 갇혀서 얼마나 무엇인가를 열망하고 있을까. 그것이 그들을 또 얼마나 고통스럽게 할까. 타인이 자신의 기준에 차지 않듯이 그들은 스스로의 모습도 부족하게 느껴질 것이다.


다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이제는 안다. 아, 내 잘못이 아니라 이것이 그들의 한계구나! 이건 내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토록 쓸모가 없는 말들이기에, 마음에 담을 필요가 없다. 나를 평가하는 시선이 아니라 그들의 한계와 스스로를 옭아맨 족쇄를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부족한 언어일 뿐이다.




나는 여전히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꿈꿨던 날들이 저 멀리 지나가 버린 것처럼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나를 가슴 깊이 존중한다. 그리고 이런 나의 마음이 나를 더 자유롭고 행복한 곳으로 이끌어 준다고 믿는다.


과거에 상처받았던 많은 말들도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안타깝다. 그 말을 내뱉은 이의 마음도 안타깝고, 그 보잘것없는 말에 상처받은 과거의 나도 안타깝다. 


그저 과거의 나를 곱게 소중하게 안아주고 싶다. 그리고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도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속삭여주고 싶다. 또, 이미 너는 그 자체로 충분히 소중하니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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