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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Aug 07. 2024

독일에서 CEO가 된 연극배우

예술가가 예술을 그만두고

“난 회사원으로는 못 살 것 같다. 진짜 회사 다니는 사람들 참 대단해!”


예술가로 10년을 살 때 친구들에게 했던 악의 없는 탄성이었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자, '회사를 다니는 것'은 나와는 다른 무언가를 삶의 가치로 두는 사람들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모르는 꼬맹이였다. 나는 독일에 오고 나서 도합 약 8년을 회사원으로 별문제 없이 성실히 잘 살았고, 이젠 회사까지 차린 CEO다. 독일에서 혈혈단신으로 차린 1인 법인 회사의 대표도 CEO라고 쳐 준다면 말이다. 사실 자영업자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만, 관심을 끌기에 CEO라는 명칭만큼 좋은 게 없으니 이번에도 이용을 좀 해본다.


독일에 오기 전 드라마 ‘미생’을 보면서, “우와! 저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회사원들의 삶이라니, 얼마나 멋진 것인지!” 이런 순수한 탄성을 내뱉던 나의 모습이 지금에 와서는 코미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회사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다른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회사를 차리다니, 진짜 웃기다. 오히려 지금은 연극쟁이로 살던 10년 전이 더 판타지 주인공 같다.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하면 뻥이 되려나.


삶의 가치가 순식간에 뒤집힌 것도 아니고, 사는 장소만 바뀐 것인데 나는 왜 이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오래전에 썼던 일기장들을 뒤적여본다. 수많은 날들을 고통 속에 몸부림쳤다. 가난했고, 재능이 없었으며 내 한 몸 돌보기도 버거웠던 날들뿐이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처녀바위가 되어 누가 낙서를 하든 말든, 가만히 앉아서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쉬고 싶다는 글에는 눈물까지 난다. 그러다가 공연을 하는 날이 되면 아직 젖은 양말에 다른 한 짝을 찾아 신지 못해 짝짝이로 찝찝해도 마냥 행복하다는 글까지 써놓았다. 그저 연극을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으로 버텼던 날들이었다고 그렇게 기억한다.


한때 예술을 하려면 뛰어난 재능이 있던가 먹고살 만한 부모를 둬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도 저도 없다면 오기라도 있어야 했다. 나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오기만큼은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연극이 아니면 목숨을 내놓으리라, 그렇게 연극에 비하면 파리 목숨 같던 내 삶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독일에 온 30살 이후 연극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마치 10년 동안 미치도록 사랑했던 연인과 이별한 듯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그렇게 또 독일에서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살고 있는 지금은 어떠한가. 지금은 잘 살고 있나? 나는 언제나 내게 참 복에 겨운 불평불만을 쏟아 놓는다는 말을 못되게 내뱉곤 한다. 예전 같았으면 상담이 뭐냐, 약이 뭐냐, 휴식이 뭐냐 싶을 정도이니 현재 분에 겹게 사람답게 살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지금 사람처럼 사는 모습에 감사한 것도 맞지만, 뭐 이 정도 산다고 그렇게 분에 겨울 것까지 있나 싶다. 나는 참 내게 참혹하게 박하다.


그러니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산 것이겠지. 살만해지니 아픈 게 아니다. 계속 아팠는데 살아야 하니 아픈 줄도 모르고, 혹은 알아도 외면하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진짜 먹고살만하니까 병원도 다니는 게 맞긴 맞다.




나도 정말이지 첫사랑과의 이별 앓이를 지독하게 했다. 내가 이 말을 쓰면 다들 자신이 내 첫사랑인 줄 알고 여기저기서 “이거 내 얘기다” 할 놈들이 많겠지만, 내게 첫사랑은 정말 한 명뿐이다. 처음엔 사랑을 받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고, 그다음엔 집착이 사랑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진짜 첫사랑은 그저 내 곁에 편안하게 있어주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헤어져도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일종의 죄책감이 들었던 적은 있으나, 혹은 승부욕에 화가 난 적은 있으나 그리워서 눈물로 밤을 지새우게 한 사람은 단언컨대 인생에 한 명뿐이었다. 한 달이 넘게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차라리 굶어 죽어야지 싶었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도록 지나도, 아무리 다른 사람들을 만나도 도저히 잊히지 않고 계속 그리웠다. 그게 내 첫사랑이다. 그리고 켄을 만나기 전까지 유일하게 내가 진짜 사랑을 해봤다고 생각하는 단 한 사람이다.


연극을 그만둔 것은 딱 그 이별의 백만 배쯤만 아픈 것 같다. 마치 헤어진 게 아니라 잠깐 시간을 갖는 거야, 해놓고 아플까 봐 몹시도 오래도록 서서히 헤어진 연인처럼 연극과 그렇게 이별을 했다. 받아들이는 데 5년이 넘게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또다시 눈물이 날 정도로 그냥 계속 그립다.


예술을 그만두게 되면 죽는 줄 알았는데, 그냥 죽을 만큼 힘든 거였구나 싶다. 그래도 어떻게 살아는 진다.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간다. 별로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냥 그전에 살았던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이 나이까지 열정적으로 연극을 아직 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지만 대단하고 멋있고 존경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내가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독일에 있었던 긴 시간 동안 나는 다른 것에 열정을 쏟고 있었고, 이것 또한 내가 새로 선택한 길이었다.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켄과 한국 중에 선택을 했어야만 했다. 그때, 매우 놀랍게도 연극 아니면 죽겠다던 내가 켄을 선택했다. 그 당시의 내 심정은 연극 아니어도 살겠는데 켄 아니면 진짜 죽겠구나였다. 연극보다 사랑한 유일한 남자였다. 그렇게 인생이 바뀌었다. 나는 독일을 선택한 적이 없다. 켄을 선택했을 뿐이고, 한국에 돌아가는 것보다 켄과 함께한 독일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행복했다. 내 행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고, 인생에서 했던 그 어떤 결정보다 이만큼 후회하지 않게 확신이 드는 결정도 없었다. 그러나, 기회비용이 조금 컸을 뿐이다.




이 날을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 우리는 이 날에 대해 이야기만 꺼내도 둘 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마치 금기어처럼 입 밖으로 잘 내뱉지 않는다. 


그날은 독일에서 지낸 지 약 3년이 넘었을 때였고, 당시 나는 한인 물류 회사에 갓 취직한 상태였다. 켄과는 만난 지 2년 정도 되었었다. 첫 1년은 워홀 비자로 지냈고, 그 이후 어학 비자와 워킹 비자로 2년을 더 독일에 머물렀다. 


짧게 말하자면, 당시 우편물 실수로 회사가 필요 서류를 받지 못했고, 외국인청에서는 회사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판단에 워킹비자 연장을 해줄 수 없다며 내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당장 한국으로 떠나라는 것이다.


나와 켄은 추방명령서를 우편으로 받고, 조용히 침대에 나란히 앉은 채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한동안 머리가 멍해진 채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변호사를 선임해서 해결을 해야겠다는 켄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하는 것도 잊고 대화를 하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제법 늦은 시간에 켄이 내게 물었다.


“Was willst du essen? (뭐 먹고 싶어?)”


매일 저녁에 다정하게 묻던 그 말에 나는 눈물이 터져버렸다. 한국에 가게 되면 이 목소리와 이 질문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고, 아직 이별은 준비되지 않았다. 나는 켄을 두고 한국에 갈 수 없었다. 우리 둘은 그제야 한참을 껴안고 집이 떠나가라 통곡을 했다. 한 시간쯤 펑펑 울고 다시 서로의 모습이 웃겨서 웃다가 배가 한계까지 고파져 밥까지 배부르게 찾아 먹은 다이내믹한 밤이었다.


이후 다행히 변호사 선임부터 비자 재발급까지 잘 해결되었다. 물론 몇 달간 걱정이 되어 조마조마했지만, 새로운 비자를 받았을 때는 정말 행복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한인 물류 회사에서는 총 5년을 일했다. 취업 당시 나는 무조건 비자 연장이 필요했기에 어떤 업무든 가릴 필요가 없었다. 구인 공고에 적힌 '고객 상담 업무'라는 글자에 나는 곧바로 한국에서의 경력을 떠올렸다. 연극배우를 하며 공연이 없는 몇 달간 4대 보험을 받으며 짧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텔레마케터였기 때문이다. 고객 상담 업무는 다양한 회사에서 전화 상담업무 교육을 받아본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약 1년간 상담업무를 혼자 도맡아 했지만, 어느새 나는 판매도 하고 있었고 물류도 보고 있었다. 고객들의 요청에 상품을 등록하기 시작했고, 오배송과 배송 지연을 직접 해결하겠다며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욕은 내가 다 먹을 것이기에, 정체 모를 책임감에 휩싸여 무리를 하곤 했다.


그 1년이 지나고 대표님은 내게 MD로 전환해 보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 사실 이미 상품 등록을 여러 번 해봤고, 당시 많은 인력이 없던 회사라 내게 MD 전환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상담은 그대로 내가 도맡아 하되 상품 등록을 더 본격적으로 해보라는 뜻과 다름없었다. 회사 사정을 알기에 승낙했다. 몇 개월 뒤 나는 팀 리더를 다시 제안받았다. 쥐꼬리만큼 올라가는 월급이었지만, 승낙했다. 조금 더 많은 돈보다는 하던 일만 하면서 안정적으로 머물고 싶었지만, 회사는 계속해서 변해가는데 나만 한자리에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10대부터 갖은 아르바이트를 다 경험해 보고 또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내 일처럼 하는 덕에 어딜 가든 관리직을 제안받곤 했다. 그래서 사실 놀랍지는 않았고, 회사의 관리직도 그다지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제법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지만 나는 그럭저럭 회사 생활을 잘해나갔고 몇 년 뒤엔 매니저 직책까지 달게 되었다. 팀 리더일 때도 그랬지만, 매니저도 그렇고 언제나 사내 유일한 여성 관리직이었다. 그 회사는 대표부터 모든 관리직이 남성이어서 그런지 유난히 여성 직원들에 대한 평가가 박했다.




5년이 다 되어가던 2023년의 어느 날, 지긋지긋한 사내 정치도 문제였지만, 도저히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시스템에 회사에서 도망치듯 퇴사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권고사직을 받았다. 코로나 이후 인력 감축 바람이 불었고 나는 팀원 중에 2명을 고르라는 말에, 팀원 한 명과 나를 선택했다. 그리곤 나를 잘라달라 부탁했다. 일이 어려웠던 적은 없었지만 회사에 피바람이 부는 동안 정이 다 떨어질 정도의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기 때문이다. 물론 나보다 이 자리가 더 필요한 다른 팀원들을 자르고 싶지 않은 마음도 분명했다. 


퇴사가 결정된 뒤에 나는 이직을 위해 여러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을 정도로 제법 높은 연봉을 부르는 곳도 있었고, 낮은 연봉 대신 주 4일을 제안한 곳도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자신감이 생겼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내게 자꾸만 왜 창업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다들 내가 창업을 하게 되면 잘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실은 나도 그랬다. 내가 창업을 하면 제법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회사에서 하는 거의 모든 프로세스를 알고 있으니 그다지 어렵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독일에 새롭게 차린 나의 회사는 현재 제법 잘 굴러가고 있다.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창업전 괜한 걱정을 과하게 한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내게 잘할 것 같으니 창업해 보라는 소리들은 근거 없는 말들이 아니었나 보다. 불안감이 높아 공황까지 치료 중이지만 이상하게 창업에 대한 두려움이나 걱정은 증상을 악화시킬 정도로 크진 않았다. 오히려 남들보다 겁도 없고 걱정도 덜한 편이었다. 날 두렵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었고, 다행히 그 대상이 돈이었던 적은 아직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밑바닥부터 올라온 인생이기에, 밑바닥이 두렵지 않아서일까? 망하게 되면 언제든지 다시 밖으로 뛰어나가 서빙 알바부터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돈은 뭐, 다시 벌면 되지. 


언젠가 창업을 해봐야 한다면 마흔을 막 앞둔 지금의 나이가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도 섰다.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일상이 있었고, 내가 해보자 했던 것은 투자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또 당연히 안정적으로 회사를 다니는 켄의 존재도 크게 느껴졌다.


결국 ‘나의 선택’이 모여 나의 역사가 된다. 어릴 땐 선택의 대가가 얼마나 클지 예상하지 못한 채, 늘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만 했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을 숨긴 채 늘 어떤 것에 얽매여 이상한 방향으로 갔다. 혹은 가치가 없는 일들에 집착하고 오래도록 매달리기도 했다. 그렇기에 헤매고 또 헤맸다.


그러나 내가 독일에 와서 연극 대신 켄을 선택한 것, 또 회사원 대신 창업을 선택한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와의 대화에서 얻어낸 결과들이다. 나는 정말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 단단하게 서 있고 싶다. 또 그 대가가 무엇이든 그 값을 치를 것이다. 목숨 같던 연극도 버린 선택을 한 번 해보니, 죽었다 살아난 사람처럼 큰 결정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데에 호들갑을 떨지 않게 된다.


사실 그러하니까. 내 삶의 희망이 다른 무엇이 또 있겠는가. 나 자신만이 나의 희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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