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이기심을 배우다.
"왜 네 몫을 챙기질 못하니!" 속상한 목소리로 엄마가 말했다.
어릴 때 명절이 되면, 엄마에게 이런 말을 듣곤 했다. 맛있는 떡국이나 갈비가 그렇게 많은데도 내 차례가 오길 기다리거나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기만 했다. 당시 명절에 모이는 친인척은 거의 50명이 될 정도로 숫자가 많았다. 그 모든 사람 중에 늘 엄마 혼자 요리를 했으니, 얼마나 일이 많았겠는가. 그 와중에 한바탕 식사가 끝나고 나면, 나는 아무데도 끼지 못하고 모두 양보를 한 채 하루 종일 쫄쫄 굶고 있는 것이다.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하고 답답하게 기다리고만 있었으니 엄마는 나를 볼 때마다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나는 늘 내가 배가 고픈 것은 다른 사람들이 배가 고팠던 것보다 덜 중요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스스로를 챙기는 법도 몰랐고, 누군가에게 챙김을 받지도 못했다. 그렇게 바글바글한 사람들 중 엄마의 식사를 챙기는 이도, 일을 하느라 바쁜 엄마 대신 우리들을 챙기는 이도 없었다. 그저 하나같이 제 입만 신경 쓰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었으니까, 아빠와 이혼하던 순간에도 그러면 제사는 누가 하느냐는 말을 먼저 꺼냈겠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라야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그딴 아빠랑 다시 만나면 안 되냐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몇 개월 전부터 인지행동치료를 받고 있다. 잘못된 신념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그것을 실천하는 연습이다. 나에겐 나의 욕구를 소홀히 하고 나를 아무렇게나 내버려두는 못된 습관이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양보해버린다. 양보, 혹은 포기하지 않고 내가 내 것을 더 챙기는 경우에는 괜한 죄책감에 휩싸여 온몸이 불안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다.
이번 주 상담 중에 '나의 욕구가 다른 사람의 욕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이 말은 남의 욕구를 짓밟으라는 뜻이 아니며, 다른 사람의 욕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이기심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내 것을 하나도 챙기지 못하면서 모두 다 다른 사람에게 퍼다 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비행기 안에 사고가 났을 때, 안내 방송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아기에게 먼저 산소 호흡기를 끼우지 말고, 부모가 먼저 착용한 뒤에 아이에게 착용하게끔 하라고. 그것이 합리적이며 둘 다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또, 힘든 날 꾹꾹 자신의 욕구를 눌러 담다 아이에게 괜히 화를 내는 엄마들도 있다. 우선 자신이 필요한 휴식이나 식사 등 욕구를 해결하고 그다음에 아이를 돌봐야 한다.
자기를 먼저 돌보고, 타인과의 경계를 명확하게 하며 균형을 지키는 것, 이것이 건강한 이기심이다.
10여년전 엄마의 일방적인 이혼 소송 이후, 소식이 없던 아빠는 나중에 자신의 서류를 떼 보고서야 이혼이 되어 있는 것을 알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게 뭐야? 왜 이혼이 되어있어?"라고 다짜고짜 따졌다. 엄마는 흥분한 아빠에게 "내가 아무리 멍청해도, 이 정도는 할 줄 알아."라는 말로 한 방 먹였다.
네 명의 고모들은 순서대로 돌아가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엄마가 아니면 누가 아빠와 사냐는 둥 별 소리를 다 해가며 다시 아빠와 만나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고모들의 억지에도 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는 이혼 이후에도 동생들 결혼식 때 잊지 않고 찾아와 축의금을 전달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고맙지 않다. 그래봤자 자기들 속 편하자고 하는 행동이었겠지. 나에게는 그들 모두가 아빠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이기적인 사람들일 뿐이다. 내 속도 모르고 가끔 친척들은 내게 연락해서 어릴 때 친했는데 섭섭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다. 쌍욕이 나올 정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호구가 된다는 게 이런 거지.
그러나, 물론 나의 아빠는 그 모든 사람들을 앞지를 정도로, 아주 압도적으로 이기적인 사람이다. 자신의 욕구가 너무나 중요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은 모두 무시했고 하찮다 여겼다. 그런 사람에게 엄마도, 우리도 모두 상처받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내 무의식 깊은 곳에서 나는 그런 사람이 절대로 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 것 같다. 절대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아빠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바람 때문에 이기심이라는 것은 나에게 크나큰 죄악일 뿐이었다.
그러니 '건강한 이기심'은 별나라 저세상 이야기처럼 너무나 멀고 멀었다. 그런 게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나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나의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은 정말 너무 비슷하다. 얼마 전, 전화 통화를 거의 30분 넘게 하면서 걱정된다는 이유로 이 말 저 말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동생아, 너 너무 열심히 헌신하면서까지 일할 필요 없어. 네가 제일 중요한 거야.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조심하고, 괜히 무슨 일이든지 다 네 문제인 것처럼 끌어안고 가려고 하지 말고. 야! 그건 그 사람이 해결할 일이야, 네 문제가 아니잖아. 너도 적당하게 사람들한테 도움을 요청하고 넘겨주면서 해야 해."
다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고 보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바로 내가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니까. 정말이지 엄마를 꼭 닮은 두 딸이었다. 가끔은 이렇게 우리 모두 벅차게 살았던 시간 속에 갇힌 채 여유로워지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열심히만 사는 것 같다.
상담 선생님은 내게, 한국어를 사용하는 엄마에게 영어를 배우지 못하고 한국어만 배우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내 모든 인생의 신념이 부모에게 온 것이 당연하다고 설명해줬다. 그래서 왜 내게 영어를 가르쳐주지 않았냐고 불만을 가질 필요도 없다. 엄마도 가르칠 방법이 없었던 것뿐이니까.
이제 나는 독일에서 독일어를 배웠던 것처럼, 다시 처음부터 하나씩 내 몫을 챙기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건강한 이기심'을 발휘한 날이면 나는 뿌듯하게 피아노 학원의 포도송이 채우듯 체크를 한다. 아직 텅텅 비어 있는 나의 체크리스트가 언젠가 가득 차길 바란다.
사실 뭐 그렇게 대단하게 잘 살아보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불안하지 않게, 잠을 좀 잘 자고 우왕좌왕하지 않는 일상을 보내고 싶을 뿐이다. 그게 이렇게나 어렵고 버겁다.
그러나 잊지 말자. 우리를 가둬뒀던 컵은 깨진 지 오래다. 나는 이제 그 무엇도 될 수 있고 자유롭다. 나의 욕구가 다른 사람의 욕구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의 몫을 온전히 챙겨줄 사람은 나뿐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 누가 다 알아주겠는가. 나의 욕구는 내게 다른 사람의 욕구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