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으로 채워진 시간들
나는 왜 이토록 많은 상처를 주며 살아왔을까? 남동생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하나의 기억이 나를 날카롭게 찌른다.
“누나, 나도 꿈이 있었어! 하지만 누나처럼 이기적이지 못했던 것뿐이야. 누나가 먼저 꿈을 가졌으니까, 나는 포기했어. 그걸 누나가 알기나 해?”
어그러진 얼굴로 나에게 소리쳤던 남동생의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아기 때 나를 '언니'라고 부르던 그 작은 아이, 초등학교 시절엔 오동통한 순둥이였던 내 남동생이 나에게 울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는 늘 우리 셋 중에서는 나만 예민하고 감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좋아하는 것도, 예술가가 되고 싶은 것도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혼란스러운 세월 속에서, 가장 깊이 상처받고 방황한 것은 남동생이었다. 그토록 예민하고 감성적인 아이인데, 우리는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와 여동생, 엄마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반면, 아빠와 같은 성별이라는 이유로 남동생은 우리로부터 본능적인 배척을 받으며 성장했다. 상담을 받으면서야, 남동생이 엄마에게 많이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고... 모든 것이 부끄러워졌다.
여동생과 내가 다투는 날에도, 엄마는 우리를 혼내다가 분을 이기지 못해 남동생에게 매를 들었다. 왜 우리의 싸움을 말리지 않았냐는 이유였다. 남동생은 그저 성별이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보다 더 많이, 더 세게 맞았다. 그러나 남동생이 맞고 있는 동안, 공포에 질린 나는 그저 매질이 나를 더 이상 향하지 않는다는 것에 오히려 몰래 안도하곤 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될 때마다, 남동생의 마음속에는 깊은 상처가 쌓여갔을 것이다.
독일에 온 지 2년쯤 되었을 때, 남동생과의 소식이 끊겼다. 엄마와 여동생은 나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도 전화 통화를 하며 소소한 소식을 주고받던 남동생이 갑자기 연락이 끊기니, 당황스러웠다. 처음에는 잠깐 지나갈 엄마와의 오해라고 생각하며, 대화를 해보기 위해 연락을 취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독일에서 할 수 있는 시도는 너무 제한적이었고,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너무 괘씸하고 속상해서 남동생의 친구나 여자친구에게 연락하는 것도 멈춰버렸다.
내가 답답한 마음에 좀 더 추궁하자 여동생은, 사실 엄마와 남동생의 여자친구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고 얼버무렸다. 엄마가 그 여자아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사실 이해가 되었다. 엄마는 남동생에게 어떤 집착이 있었다. 우리가 아직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걔도 그냥 그저 어린아이 일 뿐인데, 엄마는 남동생과 가장의 역할을 나눠서 하기를 바랐던 것도 같다. 내가 큰 딸이라서 해야 하는 역할이나 책임이 있었다면, 남동생은 장남이니까 해야 하는 역할이나 책임이 있었다. 우리 둘에게 비언어적으로 전해지는 이런 압박감은 예술을 한다며 지랄하던 나보다는 남동생이 더 많이 끌어안고 갔던 것 같다.
남동생은 고등학교 때부터 용접을 했다. 밤에 눈이 아프다며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이 간간이 떠오르곤 한다. 그렇게 어린 몸을 갈아 번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그저 연극한다며 지랄하던 꼬맹이에 지나지 않았다. 일 년에 한 번 들리는 아빠는 여전히 엄마의 돈을 착취해 갔고, 엄마는 새벽부터 밤까지 미친 듯이 돈을 벌었다. 우리에게 돈을 쓰고 아빠에게 돈을 주며 모자랄 땐 남동생이 번 돈까지 썼다. 물론 남동생이 울면서 내게 본인도 꿈이 있다고 말하기 전까지, 나는 이런 사정은 눈뜬장님처럼 하나도 몰랐다. 그저 무관심으로 무장해 상처받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신경이 너무도 예민해서,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오히려 스위치를 내린 채 살아갔다. 스위치를 내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 밤에 몰래 나가 놀이터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가끔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한참을 있다가 내려오는 날들도 있었다. 빡빡하게 괴로움으로 가득 찬 집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좋은 대학교의 연극영화과를 꿈꿨기에 가출이나 비행을 저지르진 못 했다. 당시에 이 모든 괴로움을 잊게 해주는 것은 허황된 꿈뿐이었다.
5년 정도 연락이 끊겼을 때, 남동생은 결혼 소식을 전해왔다. 그때 그 여자아이였다. 마치 의무적으로 소식을 전해야 하니까 전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들려온 결혼 소식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고, 그 해 휴가 계획이 이미 정해져 있는 데다 회사에서 진행되던 프로젝트들 때문에 도저히 한국에 갈 수 없었다. 미안한 마음 대신, 배신감에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동생과 이야기해서 세탁기니 건조기니 사라고 돈을 보내는 것으로 죄책감을 벗으려고 애썼던 것 같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여동생과 매제가 보여주는 화면으로 남동생과 간단하게 안부를 주고받았다. 피로연 중이었고, 남동생은 이제 올케가 된 그 아이와 함께 나에게 데면데면하게 인사했다. 화면 너머로도 전해지는 어색함에 나는 재빠르게 남자친구 켄을 소개했고, 그게 거의 전부였다. 이후 다시 한번 남동생과 조금 더 길게 소식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에게 내 번호를 차단하지 말아 달라고, 누나가 가끔 연락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동생은 차단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 이후로도 나는 남동생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메신저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왜 우리는 이토록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걸까.
작년 겨울에 올케는 쌍둥이를 낳았다. 여동생과 남동생도 이란성쌍둥이인데, 올케가 또다시 이란성 남녀 쌍둥이를 낳았다는 소식은 한동안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난 후, 남동생은 엄마에게 간간히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변화가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고 믿고 싶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엄마에게 무관심한 척 이것저것 물어보며 남동생의 소식을 캐물었다. 얼마 전, 드디어 엄마는 남동생의 집을 방문해 쌍둥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지 7개월이 지나서야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결혼식 이후로 처음 만나는 자리였지만, 엄마는 매일 연락을 주고받던 것처럼 아이들을 돌봤고, 남동생과 올케에게 밖에 나갔다 올 시간을 주었다고 한다.
엄마는 지난주에도 아이들을 봐주러 한 번 더 방문했다. 아이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라, 엄마의 건강이 걱정되었지만 엄마는 힘든 줄도 모르고 시간이 간다고 한다. 엄마의 행복한 목소리에 나도 그냥 우선은 행복하기로 한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서 받은 남동생의 주소로 보낼 아기 옷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함께 보낼 길고 긴 편지도 쓰고 있다.
나의 편지는 쌍둥이들의 탄생을 축하하며 밝게 시작했지만, 결국 온갖 후회와 죄책감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무도 모르고, 우리 둘의 머릿속에만 강렬하게 남은 몇 가지의 사건들이 있다. 나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나의 부끄러운 몇 가지의 잘못을 써 내려가며, 남동생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내가 아빠의 사과를 듣고 허무했듯이, 남동생도 나의 편지가 마음에 닿지 않을 수도 있다. 열흘째, 여전히 나는 편지를 쓰고 있다. 아빠에게 보낸 편지는 앉은자리에서 7장을 쉴틈도 없이 휘갈겨 썼고, 마치 원망을 토해내듯 아무렇게나 글씨가 튀어나갔다. 그러나 남동생에게 보낼 나의 사과의 편지는, 다듬고 또 다듬어 본다. 정성을 다해 쓰고 싶기 때문이다.
상담 치료를 받으며, 마음속에 답답하게 쌓여있던 의구심들이 조금씩 어떤 감정의 서랍에 차곡차곡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치료받은 이야기를 엄마와 동생에게 해줄 때마다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그 둘에게도 나의 이야기가 어떤 치유가 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편지 안에 가득 나의 소식과, 내 생각을 적을 생각이다. 상담 때 들었던 말을 전하며, 우리가 서로에게 했던 수많은 잘못과 상처들이 의도한 바가 아니라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특히 나의 징글징글했던 무관심함을 사과하고 싶다. 내가 아빠에게 배운 무관심의 언어는, 오히려 감정적인 다툼보다 가족들에게는 더 큰 상처였을 것이다.
여동생이 한 번 내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언니는 참 신기해. 우리 가족이 아닌 것처럼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 나는 항상 마치 그 속에 속해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저 감정 없이 지켜보는 관객처럼 멀리 떨어져서 가만히 있곤 했다. 상담 치료를 받으며 나는 그것의 이름이 '무력감'이라는 것을 배웠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는다, 다 쓸모없다. 그런 생각으로 참으면서, 혹은 애써 모른척하며 살아왔다. 사실, 상담 선생님이 그 감정에 제대로 된 이름표를 달아주기 전까지는 그것의 이름이 '이 정도면 괜찮지'인 줄 알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무력감'은 집어치우자. 불안하고 걱정되는 이 마음도 잠시 잊고, 우선은 진실되게 사과를 해보자. 그리고 후회하는 마음을 숨김없이 전해보자. 아주 혹시라도 조금은 남동생에게도 이런 나의 말들이 닿아 어루만져줄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편해지지 않을까?
엄마가 했던 진심 어린 후회처럼, 혹은 아빠가 나에게 보낸 허망한 사과처럼, 그 무엇이 되었든 너에게도 내 부끄러운 고백이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