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괜찮지 않았거든요.
독일 어학원에서 만난 언니는 특유의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늘 나를 걱정해 준다. “괜찮아요? 아까 앞에서 말하기 발표할 때는 너무 멋있고 긴장 하나도 한 것 같지 않았어요. 걱정 많이 했는데.” 진심 어린 언니의 말에 나는 마음의 빗장이라고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던 사람처럼 무장해제가 된다.
“괜찮지 않았어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너무 불안해서 오히려 괜찮은 척했어요. 손이 아직까지 떨려요.” 오랜 시간 무대공포증과 함께 배우 생활을 한 터라 나는 긴장감을 꽤 잘 감추는 편이다. 한때는 그것이 직업이었으니까.
이렇게 쑥스럽게 마음을 터놓고 나면 불안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진다. 멈추지 않았던 손의 떨림이 겨우 사라지자, 나는 언니에 대한 존경심이 밑바닥부터 올라옴을 느꼈다. 작년 겨울 어학원에서 만난 우리는, 같은 반 20명의 학생 중에 한국인이 나 말고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눌 때만 해도 나는 언니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의지하게 될 줄 몰랐다.
독일에 온 지는 벌써 8년째였지만 첫 해 1년을 제외하고는 독일어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은 뒤, 실업급여를 받았다. 그 후 노동청의 지원을 받아 무료로 8개월간의 독일어 코스가 제공되었다. 이미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고, 나의 법인 회사도 설립 중이었기 때문에 딱히 자격증이 필요하진 않았다. 그저 다시 오지 않을 기회로 보고 독일 어학원에 다닐 결심을 했다.
심리 상담과 약 덕분에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던 나의 불안 증세와 공황 증세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수업 시간에도 몇 번이나 공황이 찾아왔고, 그때마다 최대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심호흡을 하곤 한다. 쉬는 시간에 내게 지친 기색이 보이면 언니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늘 괜찮냐고 물어본다. 숨기는 데 선수라고 생각했는데, 들키고 나면 다 끝나버린다고 생각했는데도 모든 것을 터놓고 나면 이렇게 편안해진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나의 일상은 여전히 힘든 일 투성이고, 잘 풀린다고 말할 만한 것은 손에 겨우 꼽을 정도인데도 오히려 이렇게 모든 것이 감사하다. 게다가 매주 상담마다 지난 과거 속에서 상처 준 사람들을 다시 한 명씩 꺼내 실컷 원망하고 있고, 아픈 기억을 줄줄이 사탕 꿰듯 매일 새롭게 떠올리고 있는데도 오히려 자꾸만 새로운 이름을 기억해 낸다. 힘들 때마다 사랑으로, 우정으로 혹은 연민으로 내 곁에 와주었던 따뜻한 사람들이 항상 함께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아팠던 과거를 묻어두기 위해 소중한 기억까지 함께 잊으려고 했었나 보다.
며칠 전 연극배우 시절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꾸짖어 주었던 선배님이 생각나 안부를 물었다. 당시 내 주변에는 온통 나를 비난하고 힐난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사실 내가 그런 말을 들을 만했다는 판단까지 든다. 밥상머리 교육이라 해야 할까,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못 받은 애가 맞았고 항상 그렇게 모자라게 행동했다. 어른들과 함께일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고, 반말을 일삼았다. 물론 사십이 가까워진 지금의 나이까지도 싹수없게 말을 뚝뚝 끊어내곤 하는데, 나도 이런 내가 가끔 참 싫다.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 거지.
그러나, 그렇게 모자라기만 했던 나의 구질구질한 감사 메시지를 선배님은 과분할 정도로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잠시간 선배님이 남겨준 응원 메시지를 읽었고, 금세 눈물이 났다. 나는 여전히 이렇게 부족함 투성이인데, 정말 한결같이 따뜻하시네. 정말 마음이 태평양이셔! 나는 선배님께 내년에 한국에 방문하면 다시 꼭 연락을 드리겠다고 했다.
선배님이 당시에 곁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죽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었던 날은 없었다. 치열하게 사는 것이 맞고, 이렇게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것이 내가 응당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때 조금이라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망설임 없이 죽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애였다. 그토록 위태로운 20대였다.
치열하게, 자기 학대에 가까운 노력을 했다. 어릴 때 엄마는 우리 삼 남매를 키우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했는데, 은연중에 나도 살아가려면 저렇게 일을 해야 한다고 배웠던 것일까? 새벽부터 일어나 아르바이트를 하고, 극단에 나가 연습을 하고, 연습이 끝나면 다시 다른 일을 하러 나갔다. 쉴 수 없었다. 시급이 4천5백 원이던 시절이었고, 월세는 40만 원인데 발레 레슨을 받아야만 했고 정기적으로 피부과도 다녀야 했다. 내 돈을 투자해 독립 영화를 촬영하러 갔고, 극단에서 돈을 받는 건 애당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숨차게 달려야 했을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사실 독일에 와서도 얼마간은 원래 그렇게 사는 방법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일을 하고, 독일어를 공부했다. 적은 돈으로 아껴서 밥을 해 먹었고 있지 않아도 되는 곳에 애써 웃으며 머물렀다. 나는 나에게 소중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가 학회 때문에 독일에 올 일이 생겼고, 우리는 갑작스럽게 파리 여행을 준비했다. 우악스럽게 걸었고, 쉬지 않고 파리의 이곳저곳을 탐색했다. 이런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걸어서 신경이 곤두서지는 일정이었다. 친구도 나도 느긋한 여행이라곤 태어나서 해본 적이 없었고, 그저 열심히 하는 것에만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날도 얼마나 열심히 걸었을까. 우리는 지쳐서 어느 작은 풀밭 위에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도저히 더는 걸을 수가 없었고, 마침내 휴식이 필요했다. 대화를 나눌 힘도 없어서 숨을 고르고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눈을 떴다.
그런데, 그곳에 놀랍도록 파란 하늘이 화창하게 피어있었다.
늘, 언제나 그곳에 있었을 텐데 나는 태어나서 하늘을 처음 본 사람처럼 온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코앞에 놓고서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찾기 위해 그토록 헤매었던 걸까. 그때의 그 여행 이후 벌써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간 나는 3번이나 더 파리를 방문했다. 그러나 그때의 그 하늘이 루브르보다, 에펠탑보다,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있다.
마치 행복은 하늘 같다. 이렇게나 늘 가까이에 있는데, 눈치채지 못하고. 어디에 숨어있는 보물도 아닌데, 다리가 부르트도록 그토록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저 천천히 느릿하게 산책하듯 주위를 둘러보다 보면, 바로 머리 위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애초에 행복도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라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늘처럼 찾아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만 돌리면 어느 곳에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뛰지 않을 생각이다. 숨이 차도록 나를 몰아붙이고 학대하지 않을 생각이다. 뛰어야 할 때가 온다면 기꺼이 뛰겠지만, 행복해지기 위해 뛰는 바보 같은 결심은 하지 않기로 한다. 인생은 산책하며 사는 거다. 적어도 내 인생은 그렇게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