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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Jul 24. 2024

행복해도 되는 사람

구름처럼 천천히

생리 첫날, 통증이 어마어마했다. 침대를 뒹굴며 진통제 두 알을 한꺼번에 먹고 겨우 잠들었다가, 다시 통증 때문에 깨서 억울하고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켄을 불렀다. 익숙한 듯 찜질용 따뜻한 파쉬 물주머니와 물 한 컵을 들고 와서 옆에 눕는다. 


“이야기 지어줄까?”


잠깐 10초 정도 고민하더니 목소리를 쫙 깔고 시작한다. 한 동네에 사는 10대 청소년 릭, 리타, 조지, 엘렌의 가을밤 모험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호러로 시작되었지만, 내가 소리를 지르면 다시 덜 잔인하게 바꿔주었다. 즉석에서 아무렇게나 꾸며내는 이야기인데도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등장인물들 중에 9살로 가장 어린 조지와 유일한 여성 멤버 리타는 내 덕분에 가장 오래 살아남았고 이야기는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켄의 살벌한 이야기 솜씨와 연기 덕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생리통이 심할 땐 TV도 못 보고 책도 읽기 힘든데, 켄이 해주는 이야기는 그렇게 집중이 잘 된다. 등장인물들이 반짝반짝 빛이 나서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켄은 꼭 내가 가장 간절히 행복을 바라는 순간에 등장인물을 죽이곤 했다. 특히 가장 무서운 부분에서는 내 손을 팍! 잡으며 3D를 넘는 5D 같은 드라마틱한 효과까지 넣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소리를 빽 질러버리니 둘 다 재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아이들의 화려한 모험 이야기에 겨우 통증을 잊고 다시 잠이 들었다. 




사실, 어제 생리가 터지자 눈물부터 났다. 임신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이번달은 유달리 몸의 온도도 높고 모든 것이 다른 때와 다르게 느껴져 몹시 기대를 했었다. 그렇게 기대하다가 나중에 실망할 수 있으니,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켄의 충고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2주를 매번 야속하게 한 줄만 뜨는 테스트기를 믿지 못하고, 인터넷에 이것저것 검색해 보며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나 이렇게 또다시 실패다. 


도대체 왜 나는 쉬운 것이 하나도 없는 걸까?


생각해 보면 나는 결국 대학도 못 갔다. 연극을 10년 했지만, 이렇다 할 큰 작품 하나 해보지 못하고 커리어가 끝나버렸다. 결혼도 하지 못했고, 게다가 이제는 몇 년째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 하루하루 애써 행복하게 보내려 해도, 나에게는 너무나 큰 구멍들이 송송 나 있었다. 큰 일들은 해결하지 못한 채 나를 자꾸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절대 이뤄지지 않는다'는 이 멍청한 믿음 때문에, 나는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하지도 않으려고 노력하는 쫄보가 되었다. 그렇게 하나 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혹은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나이만 먹어가며 삶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약은 네 달 정도 먹었고, 상담은 겨우 세 달에서 네 달 정도 받았다. 그런데 답이 없어 보이던 문제들이 벌써 해결되기 시작했다. 선생님 말대로 나는 매우 모범생인 것 같다. 내가 스스로 나를 망치는 일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그냥 해보기 시작하자 그렇게 어려웠던 일들이 하나씩 해결되었다.


공황 때문에 결코 끝까지 해내지 못할 것 같았던 8개월 독일어 수업 과정을 잘 마무리한 뒤, 결국 자격 시험에 합격했다. 독일에 도착한 지 9년째였다. 이 완주의 기쁨 때문에 나는 다음 단계도 이어서 계속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 방송통신대학에 해외 거주자 전형으로 원서를 접수했다. 앞으로 4년간 길고 긴 시간일 것이지만 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결혼 문제도 해결되었다. 지난 5년 동안 아무리 해결하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문제였다.




결혼을 5년 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는 참 길고 길다.


나의 약혼남인 켄은 필리핀에서 7살 때 어머니와 함께 독일에 왔다. 이후 켄의 어머니는 독일에서 독일인과 재혼을 하였고, 그가 현재 켄의 아버지다.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더 있어서 총 네 명의 가족이 제각각인데, 켄의 아버지는 켄을 법적인 양자로 삼지 않았다. 그 뜻은 켄의 국적이 아직 필리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에 필요한 서류를 떼려면 필리핀의 서류들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켄의 필리핀 서류들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우선 5년 전 우리가 혼인 신고 준비를 시작했을 때, 켄의 출생 신고 서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엉뚱한 답변이 필리핀 주독 영사관에서 왔다.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그게 아무래도 40여 년 전의 필리핀이니 무슨 실수가 있었겠거니 싶었다.


켄은 독일에서 거의 평생을 살면서 이 같은 큰 문제가 한 번도 없었고, 사실 독일에서는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과 독일인의 차이는 거의 선거권 정도뿐이라 국적을 바꿀 필요성도 못 느낀 채 살아왔다. 아무래도 출생신고서가 필요한 일은 국적 변경과 결혼 때뿐이니 해당 서류가 잘못되어 있는 줄도 몰랐다는 것이다. 게다가 심지어 해당 서류를 재발급받기 위해서는 생부가 연락이 닿아야 하는데, 그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우리는 이 서류를 생부 없이 찾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사용해 보다 코로나가 터졌고, 이 시기 필리핀의 관공서와 독일에 있는 필리핀 영사관과도 연락이 잘 되지 않아 많은 애를 먹었다. 그리고 사태가 진정된 뒤 우리는 필리핀에 거주 중인 친척의 도움을 받아, 출생 신고 서류 원본을 찾아내는 것에 겨우 성공을 했다. 그리고 곧 왜 우리가 그 서류를 찾는 데 그토록 힘이 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켄이 여성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맙소사! 출생신고서 이후 다른 서류들은 모두 남성인데, 딱 출생신고서 그것 하나가 잘못 기입이 된 채 수십 년을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던 거다. 그러나 원본은 수정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독일에서 성별 표기가 오류였다는 증빙을 준비하고 있었다.


약 한 달 전 우리는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방법을 찾아냈다. 켄의 어머니의 서약서를 제출하고, 7살 이후로 사용한 지난 여권들에 모두 남성으로 표기되어 있는 점과 필리핀의 다른 가족관계 서류에도 남성으로 등록된 점을 모두 증거물로 제출했다. 그렇게 이번에야 겨우 혼인 신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장장 5년이 걸린, 지난한 일이었다. 물론, 신고서를 냈다고 혼인 신고가 된 것은 아니다. 이제 자격 증명을 다시 받고 몇개월 또 기다려야 한다. 독일은 그렇게 호락호락 한 곳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체하고 중요한 순간에는 뒤로 빼냈던 것 같다. 이래저래 애쓰고 있는 켄에게도 내가 결혼을 정말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알쏭달쏭한 말로 혼란을 가중시키곤 했다. 일이 잘 되지 않았으면 바랐던 것인지, 일이 되지 않도록 망치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던 행동들이다.




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나를 가로막고 있던 것은 나의 걱정과 나의 회피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답이 없다는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상황과 갈등이 일어날 만한 일을 회피했다. 특히 경제적 압박이 있을 것 같거나, 상황이 바뀌는 일들을 무리하게 회피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언제나 내 감정을 꾸욱 누르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잘 말하지 못했다. 세상이 날 돕지 않는다는 생각에 갇혀 지냈는데, 생각해 보면 세상은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몰라 돕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자꾸만 인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대학교에 가지 못한 것도 결국 나의 선택이었다. 합격한 대학교에 원서 접수를 해야 하는 마지막 날, 나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학비를 지원해 주시겠다고 하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말을 철회했고, 그 돈이 아니면 돈이 없다는 부모님의 말에 학자금 대출까지 다 알아봐 놓고 결국 입학을 포기하겠다고 대학교에 전했다. 경쟁률이 높았던 곳이었다. 나는 무덤덤하게 "더 가고 싶은 대학교가 있으니까"라는 말로 재수를 결심했다. 그러나 나는 그 이후로 여러 번 대학 입시에 도전하고 합격했지만 늘 원하던 대학교는 아니라며 입학을 포기했다. 이 정도 대학교라면 그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웃긴 말이다. 그런 생각이라면 애초에 실기 시험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원서를 넣지 않았어야 맞다.


처음엔 돈이 없다는 부모님과 약속을 어긴 할머니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반항심으로 내 인생을 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는 고집이었다. 처음에 했던 말이 진실이라면 그것보다 좋은 대학에 합격해야 맞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저 대학에 입학하여 연극을 배우고 싶었다.


당시에 이런 멍청한 결정들을 옆에서 말려 줄 어른이 없었고, 엄마는 내게 내가 하는 결정이 다 맞을 거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내가 뭘 알겠냐'는 엄마의 말은 어릴 때부터 자주 들었고, '네가 알아서 해라'는 아빠의 말도 그만큼 익숙했다. '그걸 왜 나에게 묻냐'는 할머니의 말은 차가웠고, 그 외에 다른 모든 어른들도 매한가지였기에 나는 나의 멍청한 결정이 현명할 거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때의 내가 너무 안쓰럽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해 놓고는 마지막에 비겁하게 피해 버린 겁쟁이였음을 이제는 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고작 19살 어린애였고 그마저 제대로 된 정서적 보살핌을 받지 못해 억지로 웃자란 아이였다.


술을 마실 때마다 대학교에 가지 못한 게 한스러워 친구들과 선배들에게 울면서 토로하곤 했다. 나중엔 술주정인지도 모르고 술이 정말 많이 들어가면 가끔 그런 말을 던지곤 했다. 그마저도 덜 취하면 절대 내뱉지 않는 말이었다. 그만큼 속에 콱 박힌 열등감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제 사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대학교 입학원서를 다시 넣었다. '지긋지긋한 열등감은 잠시 집어넣자. 이걸 넘어서려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어.'




그제 산책을 하면서 보니 동네가 참 예뻤다. 별것 아닌 것에도 켄과 까르륵 웃으며, 하루의 행복을 만끽했다. 아직 생리 전이라 아이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름 저녁의 선선한 바람과 조용한 거리가 그토록 편안했고, 미래에 무엇이 오더라도 켄과 함께라면 다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안하고 괴로운 밤은 가져본 적 없었던 것처럼 겁이 나지 않았고, 머릿속도 서두르는 법 없이 구름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정말이지 환상적으로 완벽한 여름 저녁 산책이었다.


생리통이 아직 남아있는 오늘, 나는 오늘도 행복하게 살기로 한다. 알고 보니 행복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나를 더 이상 망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충분히 행복해도 되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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