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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Jul 10. 2024

괜찮다는 거짓말 뒤에서

아빠의 사과와 엄마가 한 후회

선생님과 함께하는 상담 시간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대부분 채워진다. "요즘은 어때요? 그때 그 편지 보냈던 것을 떠올리면요?" 다른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지는 선생님께 나는 이제는 정말 많이 편해졌다고, 제법 괜찮은 것 같다고 대답한다.


물론, 또 거짓말이다. 나는 괜찮지 않다.


10회 정도 상담이 진행되었을 때, 아빠에게 비로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무려 A4용지 일곱 장에 빼곡하게 적힌 내 원망은 너무나 깊어서, 나도 다시 쳐다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나 쓰기 싫었는데... 첫 장에 아빠에게 안부를 묻고 다시 괜찮게 지낸다는 지겨운 거짓말을 능숙하게 쓰다가, 갑자기 모든 감정이 울컥 쏟아져 버렸다. 두서없이 쏟아진 내 상처들은 편하게 살지 않기를 바란다는 식의 저주가 되어 흩날렸다. 그렇게 쓰인 지독한 미움들이 어떻게든 생채기를 내보겠다며 몸부림을 쳤다.


다 쓰고 나서는 사실, 그 편지를 아빠에게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보내지 않을 작정이어서, 솔직한 편지를 완성할 수 있었고 만약 편지를 보내게 되면 아빠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었다.


'참 웃기지, 아빠가 상처를 받는다니. 그런 사람이? 상처를 받으면 또 뭐 어떤데. 받으라지! 아니, 받아야지! 상처를 줄 거야!'





탄생 이후 최초의 기억은 아마도 내가 두 살 정도 되었을 때인 것 같다. 나는 소름이 돋도록 유아기 때 기억을 정확하게 가지고 있는 편으로, 엄마에게 말하면 기겁할 정도다. 방 안의 공기 냄새나 엄마의 목소리, 집의 구조나 동네의 생김새까지 제법 비슷하게 기억해 내기 때문이다.


19개월 차이가 나는 동생들은 이란성 쌍둥이였고, 나는 방 안에 멀뚱히 앉아 조용하게 엄마를 바라봤다. 문 밖으로 보이는 엄마가 마당에 빨래를 널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맘 때의 엄마는 늘 빨래를 널고 있었다. 나는 육아를 해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쌍둥이와 내가 사용한 천기저귀를 포함한 빨랫감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상해 볼 수 있다. 나는 꽤 빠르게 성장하는 아기였고 기저귀도 일찍 뗐다. 거의 동생들이 태어난 직후부터 나는 장녀라면 이렇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할 셈으로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남들보다 빨리 걷고 뛰었고, 일찍 대소변을 가리고, 말도 참 빨리 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엄마를 괴롭히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늘 애를 쓰고 있던 엄마에 대한 다음 기억도 매우 처참하게 슬프다. 동생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나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엄마를 찾으러 방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 엄마가 외롭게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엄마 뭐 해?"


엄마가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봤던 것이 기억난다. 엄마는 '개구리 뒷다리' 안주를 설명해 주며 나를 놀렸고, 아빠라는 사람이 엄마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어린 나에게 터놓았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빠가 엄마를 힘들게 했다는 것은 알아들었던 것 같다. 그때 내 나이가 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여섯 살쯤이었지 않았을까. 내가 여섯 살이었으니, 엄마는 아마 서른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사실 술을 한 잔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조금 더 커서야 알게 되었고, 그날 엄마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원래 집에는 엄마만 살고, 아빠라는 존재는 가끔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 집에 놀러 가서 '와, 저 집은 아빠가 집에 사는구나.'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는 것 같다. 그러다 아빠가 어쩌다 집에 들르기라도 하는 날에는 우리는 세상 화목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웃음꽃이 활짝 피었고, 아빠의 무책임한 태도에는 아무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심지어, 엄마도 아무런 불만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왜인지 그렇게 행복을 흉내 내는 데 중독된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엄마는 우리가 모두 잠들었다고 생각되면 아빠와 싸우곤 했고, 어릴 때부터 매우 예민했던 나는 그 다툼 속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늘 비슷한 이유. 돈과 여자, 그리고 우리에 대한 무관심. 아빠는 엄마를 무식한 여자라고 가스라이팅했고, 어릴 때의 나는 아빠 말대로 엄마가 모든 것을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나, 그리고 동생들 우리 넷은 상담 선생님의 설명처럼 전형적인 피해자들의 모습이었고, 가해자가 없을 때는 서로의 행복을 갉아먹곤 했다.


동생들은 말 그대로 비행 청소년으로 자랐다. 담배를 피우고 폭력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고, 가출을 했다. 나의 '지랄'은 연극이었다. 공부를 곧잘 했고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세상에 대한 반항심은 예술을 향한 열정으로 분출되었다. 나도 사실 뒤에서 별의별 나쁜 짓들을 저지르긴 했지만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때는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


물론 그때의 엄마만큼 나이가 든 지금의 나는, 어렸던 엄마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혼자서 도대체 무엇을 어쩔 수 있었겠는가.


그 당시 엄마는 만두집이나 김밥집, 옷가게, 식당 설거지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삼 남매를 키우는 데 모든 에너지를 써야 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학교에 다녀왔는지, 야간 자율 학습을 빼먹었는지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동생 둘이서 나를 웃도는 문제들을 쉴 새 없이 일으켜 엄마가 학교에 자주 불려 다녔고, 나 정도는 문제가 될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우리는 엄마가 아파 누워있는 것을 본 적도 없다. 가끔 늦은 밤에 '아는 간호사 언니'라는 분이 집에 와 링거를 놔주긴 했는데, 아침이면 다시 엄마는 아프고 지친 몸을 이끌고 돈을 벌러 나갔다.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여동생은 엄마에게 자주 뺨을 맞아 울었고, 남동생의 장래 희망은 깡패였기에 엄마를 자주 울렸으며, 나는 위대한 열정을 가진 예술가 지망생이라며 고뇌가 많은 척 이 모든 현실을 회피했다.


우리가 이렇게 살기 위해서 비명을 질러대는 동안, 아빠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다른 집에서 젊은 여자와 나뒹굴며 행복해했을까. 아빠는 가끔 얼굴을 볼 때마다 나에게 새로운 사업에 대해 설명했고, '멍청한 엄마는 이해하지 못해도 똑똑한 큰딸은 모두 이해할 것'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곤 했다. 나는 아빠의 사업계획이라는 게 굉장히 허황되고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믿으려 했다. 아빠 말처럼 똑똑한 딸이라면 믿어야 할 것 같았고, 믿고 싶었다. 언젠가는 아빠가 진짜로 성공을 해서 우리와 함께 큰집에 이사도 하고, 고생도 다 끝나게 하는 날이 올 거라고 정말 믿고 싶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빠의 카카오톡이 연결되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켄은 나의 아빠를 늘 궁금해 했다. 켄은 내가 아빠에 대해 설명할 때마다 캐릭터가 너무 왔다 갔다 하고, 평가도 늘 널뛰기 때문에 오히려 호기심이 생겼다고 한다. 사실 나도 아빠를 십 년 만에 보는 것이 매우 기대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국에 방문한 작년 봄, 함께 아빠를 만났고 그리고 그때 번호를 받았다.


편지를 보내던 날, 나는 하루 종일 불안해하며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결국 켄의 도움을 받아 편지 스캔본을 보내놓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나의 '괜찮아' 연기는 사실 끝내주지만 켄은 내 꾸밈과 상관없이 나를 토닥여 주었다. 나를 읽는 켄의 사랑이 더 한 수 위니까. 나는 원인 모를 불안함에 울고 또 울고, 그렇게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빠에게 답장이 와 있었다. 원했던 대답은 아니었고, 허탈하기까지 한, 공허한 사과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날 상담이 잡혀 있었고, 켄에게는 답장이 왔다는 내색도 없이 상담실로 달려가 불안하게 상담 시간을 기다렸다. 선생님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용기 내기가 쉽지 않은데, 정말 잘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고 해줬다. "보내고 나니 기분이 어땠어요? 또, 답장을 읽으니까 어땠어요?" 나는 대답을 위해 한참을 고민했다. 나도 이게 무슨 기분인지 헤아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를 드디어 해내서 개운하기도 한데, 사실 불편하기도 해요.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아요. 편지를 괜히 보냈다는 후회가 들어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기까지 해요."


선생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부모와 자녀 간의 역할을 학습해왔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했다. 또한, 편지에는 솔직한 내 마음만 담겨 있으므로 전혀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를 잘 정리해두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기 때문에 나의 미래를 위해 이런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도 설명해 줬다. 그렇기에 답장의 내용보다는, 아빠가 답장을 보냄으로써 나의 편지를 읽었다는 확인이 되기에, 그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그런데 선생님의 그 모든 맞는 말들이 이상하게, 공중에 둥둥 떠서 나에게는 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불안했고, 다시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상담이 끝난 뒤 집에 와서 선생님의 조언대로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말해주었다. 아빠에게 보냈던 스캔한 편지의 전문을 함께 첨부했다. 읽는 동안 조용히 한참 말이 없던 동생은, 흔들리는 목소리로 놀라며 나를 응원해 줬다. "언니, 어떻게 했어? 이걸 보냈다고? 정말 대단하다... 나는 이렇게 못 해." 동생의 몇 마디에 난 또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세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안타깝게 흘러버린 시간들에 대해 깊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롯이 우리끼리만 서로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아픔이어서, 그것을 함께 나눌 자매가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러나, 후폭풍이 무서운 법이다. 어쩌면 나는 생애 첫 상담을 진행하며 조금만 노력하면 나의 이 모든 불편함이 빠르게 해소되리라고 어설프게 믿었기 때문에, 섣부른 용기를 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에게 편지까지 보냈는데, 왜 나는 바로 괜찮아지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왜 나는 자꾸만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을까?




요즘은 엄마랑 유난히 자주 전화를 한다. 상담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내가 이제 켄을 만나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자꾸 슬픈 생각이 드는 거라는 이론을 펼쳤다. 엄마가 자꾸 불쌍하게 느껴지고, 어렸던 나의 모습이 안쓰러운 이유도 다 내가 지금 행복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계속 불행했으면 깨닫지 못했을 거라는 뜻이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치열하게 살았던 이십 대를 떠올려보면 실신 후 응급실에 실려가 놓고는 병원비 걱정부터 했던 나였다. 좁은 고시원에서 혼자 쓰러졌다가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리고 나면, 돈을 아꼈다는 생각에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맘때의 나는 자주 굶었고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했다. 그때부터 이미 잠을 잘 자지 못했고, 숨을 쉴 수 없어 소스라치게 깨곤 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오래도록 밤거리를 배회했고, 다시 새벽부터 일을 나가 몸을 혹사시켰다. 내가 만약 그때처럼 여전히 하루의 성실함에 목숨을 걸었다면, 이렇게 상담을 다닐 생각이나 했을까? 또 과거를 떠올릴 시간은 있었겠는가. 어디 아빠를 원망할 기력이나 있었겠는가.


얼마 전 길어진 통화에서, 엄마는 후회된다는 말을 했다. 엄마의 후회는 아빠를 진작에 떠나지 못했다거나, 차라리 우리를 버리고 행복한 삶을 찾으러 가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엄마도 후회되지. 그렇게 예쁜 너희 셋인데, 왜 한 번을 따뜻하게 학교 잘 다녀왔냐고, 오늘 하루 어떻게 보냈냐고 물어보지 못했는지... 그저 그냥 새끼들 입에 들어가는 것만 생각해서, 그것만 보느라 마음은 한 번도 생각해주지 못했던 게 그렇게 후회가 돼. 엄마라고 그런 거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아니야. 그때는 그냥 엄마도 그런 걸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힘들었어."


아빠의 사과는 공허했지만, 엄마의 후회는 나의 마음을 깊게 어루만져주었다.


엄마는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쯤부터 심한 우울증을 겪었던 것 같다. 우리 셋이 학교에 가고 나면 창문과 커튼을 치고 몇 날 며칠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로 혼자 가만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40kg도 되지 않아 초등학생인 동생들보다 훨씬 덩치가 작았던 엄마를 기억한다.


친척들의 지원이 모두 끊긴 어느 날부터 엄마는 그 작은 몸을 이끌고 일을 하기 시작했고, 여전히 일을 한다. 여러 일을 전전했던 엄마는 현재 요양보호사로, 이제는 일을 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한다. 그게 진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독일에 살면서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불효녀가 걱정할 주제나 될까.




상담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나에게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보고, 켄은 매일 아침 괜찮냐고, 잠은 잘 잤냐고 묻는다. 엄마와 여동생도 내가 늘 괜찮은지 궁금해하고, 오랜만에 연락하는 친구들도 종종 내 상태를 물어본다.


나는 늘 괜찮다고 답한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하나도 괜찮지 않다. 그러나 괜찮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일지 모른다. 비아냥이 아니라, 정말 팔자 좋은 소리니까. 그리고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나에게 안부를 물어봐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


그건 정말, 진심으로 가슴이 아리도록 괜찮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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