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선택
본가에서 빨간색 경기버스를 타고 양재역까지 가는 데 꼬박 한 시간이 걸린다. 양재에서 강남까지는 신분당선으로 한 정거장. 환승과 걷는 시간까지 합치면 90분은 족히 걸리는 출근길이다. 하지만 일단 경기버스를 타고 나면 부족한 잠을 잘 수 있었기에 경기도민에게는 꽤 좋은 조건이었다. 강남역 지하 통로에서 삼성전자 건물로 들어가 1층으로 올라오면 바로 앞 건물이었다. 사람을 신경쓰지 않고 쌩쌩 달리는 차들의 눈치를 보며 길을 건너면 거의 도착한 셈이다.
퇴근길도 똑같다. 인턴이라 야근을 하는 날이 많지 않아서 6시 반이면 이미 빨간버스에 몸을 실은 뒤였다. 그 시간에는 잠이 오지 않는다. 핸드폰을 켜고 인스타그램을 스크롤하며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로 영상을 몇 개 본다. 가끔 블로그를 쓰기도 한다. 본가에 살면서 부모님께 월세도 드리지 않고 엄마 밥을 먹는 직장인의 삶이란. 회사에서 나는 팀장님께 ‘삐약이’지만 집에서는 부모님께 ‘삐약이’다. 전자는 가르쳐야 할 게 많은 삐약이고, 후자는 몸만 자란 삐약이다.
월급날이면 오전 11시쯤에 입금 알림이 뜬다. 자취를 하지 않는 덕에 월 150만원씩 적금을 부을 수 있다. 6개월 동안 근무하면 벌써 900만원이다. 사회초년생에게는 적은 돈이 아니다. 적금을 넣고 나면 남은 돈으로 생활한다. 빨간버스가 비싼 편이라 식비와 교통비가 비슷하게 들어가고, 큰 맘 먹고 엑셀 특강을 끊은 달에는 지출 금액이 커진다. 하지만 일단 자산을 천만원 단위로 모은 뒤엔 일정 비율 안에서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것이 낭비가 아님을 책과 유튜브를 통해 배웠다.
나는 집순이다. 주말에도 기껏해야 동네에 있는 카페에 가서 책을 보거나, 취업 준비를 하거나, 업무 공부를 한다. 주중에 못 간 헬스장도 간다. 나는 원래 운동을 좋아한다. 수영, 요가, 발레, 필라테스, 스케이팅. 안 해본 운동이 없지만 굳이 헬스를 하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다. 장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몸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꾸준히 근육을 붙여야 한다. 가장 실용적인 운동이다. 이런 루틴으로 살다 보니 소비 패턴도 일정하다. 눈에 띄는 소비가 있다면 셋 중 하나다. (1) 지인 선물 (2) 의류 구입 (3) 자격증 수험료 및 인터넷 강의 수강료
인턴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정규직이 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평생 직장이 없는 세대다. 거주지 변경은 물론 자산 관리까지 훨씬 더 촘촘히 계획해야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선택지가 늘어나는 동시에 너무 많은 것을 선택해야 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직장에 첫 발을 내딛은 나는 소리없이, 그러나 빠르게 현실적인 선택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 현실이 정말 현실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인턴이라는 게임 속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