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 회사가 항암제를 선택한 이유
초코파이와 항암제, 기묘한 동거의 시작
2024년 1월, 국내 투자 시장을 발칵 뒤집어놓은 소식이 전해졌다. 국민 간식 ‘초코파이’로 유명한 식품 기업오리온이 국내 최고의 ADC(항체-약물 접합체) 기술력을 보유한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현 리가켐바이오)를 5,500억 원에 인수한다는 뉴스였다.
당시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과자 팔아 번 돈을 밑 빠진 독(바이오)에 붓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고, 발표 직후 오리온의 주가는 급락했다. 하지만 2026년 현재, 이 결정은 대한민국 M&A 역사상 가장 선구적인 ‘이종 산업 간 결합’ 사례로 칭송받고 있다.
왜 ‘레고켐’이었나: 플랫폼의 힘
오리온이 수많은 바이오텍 중 레고켐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했다. 레고켐은 특정 신약 하나에 올인하는 회사가 아니라, 항체에 약물을 정교하게 붙이는 ‘플랫폼 기술(ConjuAll)‘을 가진 회사였기 때문이다.
2025년을 기점으로 글로벌 제약 시장에서 ADC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레고켐은 이미 얀센(Janssen) 등 글로벌 빅파마에 조 단위 기술 수출을 성사시키며 실력을 입증한 상태였다. 오리온은 레고켐의 독보적인 기술력이 ‘글로벌 잭팟’을 터뜨릴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고, 현금이 풍부한 식품 사업의 장점을 살려 레고켐이 임상에만 집중할 수 있는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기로 한 것이다.
2025-2026: 맺어지는 결실들
인수 후 2년이 지난 2026년, 오리온의 베팅은 숫자로 증명되기 시작했다.
• 기술 수출 가속화: 오리온의 자금 수혈 덕분에 레고켐은 자금 걱정 없이 독자 임상을 확대했다. 2025년 한 해에만 글로벌 빅파마 3곳과 추가로 다중 타겟 ADC 기술 수출 계약을 맺으며, 누적 기술 수출 규모는 10조 원을 넘어섰다.
• 리가켐바이오(Ligachem Bio)로의 재탄생: 2024년 사명을 변경하며 ‘화학(Chemistry)‘과 ’생물(Bio)‘의 결합을 강조한 리가켐은, 오리온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중국 및 동남아시아 시장에서의 파이프라인 확장 속도를 높였다.
• 신규 모달리티 확장: 2026년 현재, 리가켐은 ADC를 넘어 ‘이중항체 ADC‘와 ’바이러스 유사 입자(VLP) 플랫폼‘까지 영역을 넓히며 세계적인 바이오텍으로 우뚝 섰다.
‘현금 창출원’과 ‘미래 성장동력’의 이상적 만남
오리온의 사례는 국내 중견•대기업들에게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식품 사업에서 발생하는 안정적인 현금(Cash Cow)을 바이오라는 고위험•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 분야에 재투자함으로써 기업의 가치를 단기간에 퀀텀 점프시킨 것이다.
“우리는 초코파이를 파는 회사가 아니라,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는 ‘라이프 케어’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2026년 주주총회에서 나온 이 발언은 더 이상 허황된 구호가 아니다. 리가켐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기술료 수익(마일스톤)이 오리온의 연결 실적에 반영되기 시작하면서, 오리온은 ‘성장이 정체된 내수 식품주’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