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나던피 Dec 31. 2022

타임머신을 타고 온 미래의 내가 알려준 행복

10년 후의 인생 체험기



이탈리아 북부에서 한 달 살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지 2주 조금 지난 지금에야 본래의 한국에서의 내 삶에 적응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이란 참으로 신기한 동물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한평생, 4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국의 문화와 정서에 나를 일체 시켜왔는데 대략 9000km나 떨어져 있는 먼 이국땅 이탈리아에서의 30일 남짓한 시간에 금세 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이번 한 달 살기를 이탈리아 북부지역으로 결정한 이유는 단연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이었다. 도시의 빽빽한 빌딩 숲과는 달리 넓고 탁 트여서인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그 공기가 시원하다 못해 콧구멍을 시리게 할 것 같았다. 사진 속 시골 마을의 호수들과 작은 고성들까지. 여기에는 다소 사사로운 여자로서의 귀여운 욕망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로 이탈리아 남자들이 모든 여성을 그렇게나 아름다운 존재로 여긴다는 것. 그래. 나도 그런 대접을 받아보고 싶었지. 내가 머무른 슐레르 산 근방 숙소에는 나이스한 노년의 여유를 즐기는 부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의 남편과 10년 전 결혼에 골인한 후, 한국. 그 안에서도 나의 작고 사랑스러운 도시 대구를 떠나 2년에 한 번씩 그저 지금, 여기와는 다른 곳이면 된다는 단 한 가지 조건만 내건 채 낯선 곳에서 한 달 살아보기를 실천해오고 있다. 그렇게 마흔세 살이 된 현재까지 총 네 번. 처음 남편에게 이런 제안을 했을 때 뜨악해하는 그의 표정이 만화 둘리에 나오는 꼴뚜기 왕자님 같아 아직까지 잊히지가 않는다. 이런 이야길 하면 남편은 항상 반달눈을 하며 “내가 무슨 꼴뚜기 왕자님이야~! 그냥 왕자님이지~”하며 웃는다. 가뜩이나 좁은 한국 땅인 데다 산으로 동그랗게 둘러싸여 열기가 그득한 대구를 떠나 살아본 경험이 없으니 이 정도의 장기 프로젝트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 꺼내 본 말이었다. 그를 설득하는데 얼마 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러라 말해주는 그 사람. 내가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결정한 일에는 전적으로 나를 믿고 따라주었다.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내 성장에 관해서는 늘 서포트해 주려 한다. 연애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런 순간에는 더없이 큰 존재로 곁을 지켜주는 고맙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그렇게 제주도에서의 한 달은 남편과 함께, 강원도 고성에서는 고즈녘하게 나 혼자, 일본 후쿠오카에서 또 남편과 함께 한 달을, 이번 이탈리아 일정은 남편의 회사 일로 다시 또 혼자.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는 건 그이와 내가 시간으로부터,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었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믿고,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야심한 밤 호롱불처럼 은은한 빛을 내는 스탠딩 조명에 의지하며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는 이 시간. 문득 어쩌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지금 내 만족스러운 삶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더라.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삶에 놓인 선택의 순간 방향키가 되어주는 콩알만 한 씨앗이 심기곤 한다. 텔레비전만 주야장천 보던 고등학생 시절, 이 바보상자가 고장 나 버려 엄청난 무료함을 겪어야 한 적이 있었다. 그 공간을 채우던 소음이 사라지니 어찌나 낯설고 어색하던지. 적막함과 지겨움을 달래기 위해 펼친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가 그렇게 재밌게 읽힐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스스로 독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규정지은 탓에 더 놀라버렸달까. 분명 글자를 읽고 있는데 글에 묘사된 장면들이 상상 속 스크린 화면에 생생하게 상영되며 후각, 미각, 촉각, 시각, 청각. 그간 쌓아둔 온몸의 감각 데이터를 이용해 글자와 문장, 글을 이해하는 경험은 생경하면서도 짜릿한 일이었다. 글로 묘사된 장면들 속 어딘가에 체험자가 되어 함께 존재하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나는 마음속에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씨앗을 심을 수 있었다.


읽는 일과 더불어 그 시절의 싸이월드는 대국민을 1인 작가로 만들어주는 플랫폼이었다. 접촉 불가한 온라인 세상에서 자신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도록 배경음악을 선정하고 배경 테마, 미니룸을 꾸몄으며, 일상의 기록으로 일촌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추억의 공간인 싸이월드. ‘일기장’이라는 한 구역에 개인의 이야기를 써내려 갈 수 있는 그 공간. 일촌이든 아니든 내 글을 봐줄 ‘독자’가 있다는 전제 하에 써 내려가는 글이었기에 사적이면서도 공공연하게 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의 사색이 담겨있는(그러면서 현학적인 허세가 고스란히 담긴) 글을 누군가 읽어주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써 내려간 일기장으로 인해 ‘쓰는 일’에 대한 씨앗을 심게 되었다. 


특히나 글을 쓰는 일에 관해서는 대학원 생활을 통해 내 논문 한 편을 써본 경험이 그 씨앗의 크기를 키워주었다.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내 주장을 펼치는 일, 이론적인 근거를 내 시나리오에 맞게 재구성하는 일, 수치를 이야기로 만드는 일 등. 논문이라는 형식이 주는 지루함과 딱딱함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으나 8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글을 써 내려간 과정과 끝내 마무리 지은 경험은 내게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씨앗이 꽃이 될지, 나무가 될지, 덩굴이 될지, 잡초가 될지를 결정짓는 건 결국 마음속 본연의 무언가 일 터였다. 내리쬐는 볕과 텃밭을 시원하게 적시는 비를 맞으며, 밀려오는 바람을 숨구멍에 불어넣다 보면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새싹이 움트게 되는 것이다. 글을 읽으며 내 세상을 덧대어 갔고, 딱 10년 전 서른세 살에 시작한 글 모임이 ‘쓰는 사람’이라는 새싹을 움트게 해 주었다. 친구 만듀가 표현력의 한계로 인해 글 쓰는 일에 대한 필요를 여실히 느끼게 되었다 말하며 내게 제안해준 글쓰기 모임. 바로 모임을 만들어 만듀와 맛탕(만듀가 아끼고 좋아하는 동생이자 이제는 나와도 친한 그녀) 나까지 세 명이서 소담 소담 오붓하게 쓰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글의 주제를 무엇으로 할지 글감을 나누고, 하나의 주제로 각자의 이야기를 적어보는 경험은 기대했던 것보다 나를 더욱 들뜨고 기분 좋게 만들었다. 


얕보던 작은 불씨가 큰 불을 만들고, 주먹 만한 눈덩이가 굴러 산 덩이처럼 커지는 것처럼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니 띄엄띄엄 연쇄작용이 일어났다. 글 쓰는 일이 재밌어져 개인 블로그를 만들고 그 공간에 퇴근 시간 6시가 되기 30분에서 1시간 전에 '퇴근 일기'를 적어 올렸다. 말이 퇴근일기지 일과는 거의 관련 없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퇴근을 할 때면 이미 내 하루의 반절을 보낸 것과 다름없었기에 아침에 잠에서 깬 그 순간부터 기록하고 싶은 소소한 일들, 점심시간 산책을 하며 떠오른 생각, 일을 마치기 전까지 있었던 해프닝들 중 그날그날 적고 싶은 이야기를 나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언어를 빌려 그 공간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날의 방문자와 조회수라는 직접적이고도 가시적인 수치가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순간이 많았지만 그래도 조바심을 내지 않고 덤덤히 글을 업로드했다. 정말 무던히도 애썼다. 나를 제일 피곤하고 성가시게 하지만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 ‘꾸준히’ 하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에 관해서는 더욱이 그랬다. 만듀가 한 때 지어준 별명이 기미년(기록에 미친 x) 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글에 조회수가 0인 날도 있었지만 어떨 때는 ‘이 글이 이렇게나 많이 읽혔다고?’ 싶은 글도 있었다. 결국에는 누군가 내 글을 읽어준다는 사실이 좋았다. 가끔 달리는 댓글에 ‘너무 공감된다.’, ‘나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말들을 보면 내가 영 터무니없는 글을 적고 있지는 않구나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니나 던피님의 글은 담백하고 담담하게 쓰여있지만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다. 글을 읽다 보면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진다.’는 댓글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주변의 친한 사람들이 글을 읽고 기분 좋은 평가를 해주는 것과는 질이 다른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익명의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내 진심이 통한 것이다. 뉘앙스가 섞인 말도, 전달력 좋은 영상 매체도 아닌 나의 글로 누군가를 감동시켰다니.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좀 더 좋은 글,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자 마음먹게 되었다. 그렇게 플랫폼을 확장시켜 블로그와 더불어 브런치에도 나의 글을 업로드했고, 마음먹고 작가 활동 계획서를 작성하여 작가 등록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정말로 재밌는 일이 일어났다.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출판사 두 군데에서 책 출간 제의를 해온 것이다. 엥...?!?! 브런치에 연재한 글들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나만의 경험이 만들어 낸 특수성이 있었기에 독자들의 공감을 사면서도 흥미를 느끼는 요소가 존재했던 것 같다. 아마 그 무렵 시작한 계란빵 장사 덕분이겠지.


남편과 나는 연애 시절부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해오던 말이 있었다. “우리 결혼하면 계란빵 장사하자~!!” 이유는 상당히 단순했는데 남편과 내가 계란빵을 정말로 좋아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럴듯한 이유를 더해보자면 우리에게 완충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이 유난히 고되고 어깨를 짓눌러 삶이 무겁게만 느껴지는 그런 날. 우리는 서로에게 “괜찮아~! 다 때려치우고 계란빵 장사하면 되지!”라는 마법의 주문을 외워 서로에게 꽃가루를 팡하고 터트려주고 기분 좋은 향수를 칙 뿌려주었다. 이 말을 주고받은 날에 우리는 더없이 행복해졌다. 인생의 고단함과 그늘은 어디로 사라지고 유쾌함과 밝은 빛이 드리웠다. 단순하고 가볍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우리는 계란빵 장사에 꽤나 진심인 부분이 있었다. 데이트 도중 계란빵 반죽은 무엇으로 만들지, 호두빵 모양에 메추리알을 넣어 팔아도 재밌을 거 같다던지, 계란빵에 어울리는 소스도 같이 곁들이면 좋을 거 같다며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장사에 대한 진심이 짙어지고 계획이 구체화되면서 결혼 후 어느 시점에 이르자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 계란빵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서로의 본업은 유지한 채로 말이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글로 옮겨 브런치에 연재하였다. 가게의 이름은 ‘계라니라니’. 작은 트럭을 구매해 장사할 수 있는 장소를 선별하고 특별한 제약은 없는지를 검토하며 시험 삼아 계란빵을 팔기 시작했다. 유동인구가 많은 시내, 상가들이 밀접해 있는 곳, 대학가 등을 돌며 장사가 가능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우리 부부가 직접 구워 낸 계란빵을 팔아본 것이다. 본업에서 퇴근하자마자 반죽을 만들고, 호두와 계란, 메추리알을 챙기고, 냉장고에 넣어둔 각종 소스통을 챙겨 트럭에 실어 나르길 1년. 손님들에게 맛에 대한 피드백을 들으며 부단히 맛을 보완해나가다 보니 우리가 오는 날을 기다려 계란빵을 사가는 손님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맛은 좋았던 거다! 밤잠 줄여가며 장사를 해서 힘에 부쳐도 이럴 때마다 마음속에 보람과 즐거움을 한가득 채워 고단함을 보상받았다. 물론 진상 손님을 만나 서러울 때도 있고 남편과 피곤에 지쳐 싸우고 화해하는 날도 더러 있어 힘들기도 했지만 문제는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이 모든 과정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될 뿐이었다. 그러면서 이 모든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들을 낱낱이 글로 적어 올렸다. 독자들의 댓글을 보며 위안받고 또 현명한 조언을 듣기도 하며 밀도 높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장사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우리는 나름 적당한 크기의 상가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점포를 계란빵집이자, 서점이자, 커피집으로 꾸려나갔다. 정말이지 우리의 취향이 고스란히 녹아든 곳이었다. 서점 한쪽 구석에 글을 쓸 수 있는 작업 공간을 마련하게 되면서 내 본업이었던 임상심리사를 그만두고 전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나름 프리랜서랄까? 서점은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들은 물론 독립출판물까지. 작지만 다양성이 존재하는 졸망졸망한 곳이었다. 서점을 가로질러 조금만 더 깊숙이 들어가면 그린프라이덱, 핑크드래곤, 엘리펀트 이어 같은 잎이 큰 식물들로 구역을 나눠놓은 원두향 그득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가게 바깥쪽에는 길거리 노상을 떠오르게 하는 옛 감성의 인테리어에 자동으로 계란빵을 구워내는 기계가 손님들에게 맛있는 간식과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남편과 함께 상상만 해오던 일, 꿈같던 일을 일궈내며 내 책까지 출판한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남편과 나는 이 공간을 빌미로 한 달에 한 번은 귀여운 이벤트를 열곤 한다. 노래방 기계를 빌려 무대를 만들어두고, 그 공간에 있는 누구라도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한 적이 있었다. 서점이자 커피집이자 계란빵집에서 노래라니?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시작하고 보니 공간이 주는 부조화스러움에 정제되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가 채워지니 신선한 재미가 피어올랐다. 낯선 공간에서 쉽사리 용기 내지 못하고 쭈뼛거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남편이 첫 타자로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한 번은 발라드를 즐겨 듣는 남편의 평소 취향과는 달리 팝송을 부른 적이 있었다. Topolader의 불후의 명곡 Dancing in the moonlight을 선곡하다니!!! 땐씽 인 더 문라잇~! 에블바리~! 처녀 시절부터 좋아해서 생각날 때 찾아 듣는 노래... 였는데... 어쩜...! 혹시 날 위해...?? 괜히 혼자 감상에 젖었더랬다. 남편이 노래를 하고 나면 줄줄이 소시지처럼 연이어 도전자가 속출했다. 박수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 사람들의 이목을 많이 집중시킨 사람에게 원하는 책을 선물해주는 소소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식구들, 친한 지인들을 모두 초대하여 독서토론을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자신 있는 주제로 사람들을 모집해 강연을 해보기도 했다. 나에게는 너무 익숙해 무익에 노잼이라고 생각되는 주제일지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보다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또 이 모든 일을 글로 써 내려갔다.


이제 글을 쓰는 작가라는 타이틀이 내 밥벌이가 되었다. 나는 이제 무엇이든 쓰는 사람이다. 일상에서 얻은 소소한 나만의 이야기를 매주 4번 한 달치 구독료를 받고 독자들에게 메일로 보내주고 있다. 가끔은 공부할 요량으로 과학저널에 특정 주제로 글을 써보고 싶다고 먼저 제안서를 보내기 한다. 반은 수용되고, 반은 거절되지만 허락해 주는 곳이 한 군데라도 있기에 '왜 운동 세포에 대한 글을 쓴다고 까불거렸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공부도 하고 내가 이해한 바를 글로 써 내려갈 수 있다. 이런 내 삶이 신기하면서도 재밌고 감사하다. 물론 글을 쓸 때는 머리가 미어터질 것 같이 열이 오르고, 계속 써오는 일을 해옴에도 마땅찮은 언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내 실력은 아직 여기 까지는구나 아쉬워하면서 쓰고 또 쓴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 드는, 내 어지러운 머릿속 어떤 생각의 덩어리를 꿰뚫는 문장 하나가 떠오르곤 한다. 그 맛에 글을 계속 써나간다. 


남편과 꿈꾸던 공간을 꾸려나가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글을 쓰고, 가족, 사랑하는 사람,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아주 자유롭게. 가끔은 힘들어도 사소한 행복이 더 많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쭉 발길이 이끄는 대로 커가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The Secret Life of Nina Dunphy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