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면서 내 이름표와 함께 처음 겪어보는 서른 넷이라는 생의 숫자를 달게 되었다. 내 삶에 놓여있던 고통과 투쟁, 용기, 사랑들이 쌓여갈수록 기억창고에 저장해 둔 지난날 시청각자료들의 화질이 선명함을 잃어간다. 우리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길 좋아하지만 삼십사라는 숫자에는 특별한 의미나 특이성을 부여하는 일을 여태껏 목격하지 못한 듯하다. 중2병, 낭랑 18세, 스물다섯 스물하나,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서른 즈음에, 불혹, 오십견, 환갑, 등(일흔과 여든부터는 내 앎이 모자란 탓인지 검색을 해봐도 대표적인 수식어가 나오질 않는다). 나이에 따라 참으로 다양하고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나열해 보니 내 나이 서른넷이 어쩐지 시시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로 의미공백의 숫자 34에 어울리는 찰떡같은 옷을 입혀주고 싶어졌다.
개인적으로 30대라는 나이는 어쩐지 익살스럽게 느껴진다. 어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영글지도 않은 조금은 애매한 스탠스의 나이. 그러면서도 새로운 나를 조각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에 내몰리는 나이. 안주하기보다는 아직은 가능성을 쫓는 나이. 33년이라는 시간을 지금의 내가 될 수 있는 시간을 살아왔다면, 앞으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나로 살아보고 싶어졌다. 아인슈타인의 말이 떠오른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내일을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상이다.” 명언으로 마음이 동했다 말하기에는 괜히 민망하고 건방진... 조금은 냉소적인 어른이 되었지만 내 남은 여생을 정신병 환자가 되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되어야 했고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산다면, 내 무덤에는 미처 쓰지 못한 책, 실현하지 못한 아이디어, 사랑과 관용이 없는 관계, 펼치지 못한 꿈이 묻히게 되겠지. 나는 빈손으로 떠나겠다.
이런 결심을 백지 위에 써 내려가는 와중에도 마음을 탁하게 만드는 자기 의심이 불꽃을 틔워 불쾌한 연기가 메케하게 피어오른다. 나를 의심하고 낮잡아 보는 일이라면 이제는 이골이 난다. 그러면서 이 지긋지긋한 생각을 약속이나 한 듯 매번 처음으로 떠올리고 만다. 어제의 “내가 할 수 있을까?”는 오늘의 “나라고 못할게 뭐야”라는 다름을 만들 수 있겠지. 그러니 어제까지의 가난과 어제의 콤플렉스들과 어제의 관계들, 어제의 지난한 사유와 감정들은 오늘의 내게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똑같은 장면 속에서 다른 내가 될 수만 있다면, 나는 다름을 선택하겠다.
어제는 불온전하고 무뎠으나 오늘은 날카로운 정신을 유지하겠다. 어제는 미워했으나 오늘은 사랑하겠다. 어제는 편안했으나 오늘은 불편해지겠다. 어제는 고민했으나 오늘은 결정을 내리겠다. 어제는 쉬웠으나 오늘은 어려울 것이다. 어제는 나만 봤지만 오늘은 내 앞의 사람을 보겠다. 어제는 자극적이었으나 오늘은 지루할 것이다. 어제는 그냥 하지 않았다면 오늘은 그냥 해보겠다. 어제는 완벽을 바랐지만 오늘은 완수를 바란다. 어제는 나태했지만 오늘은 성실하다. 어제는 녹슬었으나 오늘은 움직인다. 어제는 움켜쥐었다면 오늘은 나눈다. 어제는 꾸물거렸으나 오늘은 시작해 본다. 어제는 거부했지만 오늘은 수용하겠다. 어제는 울었다면 오늘은 웃는다. 어제는 꿈꿨으나 오늘은 현실을 살겠다. 어제와 오늘, 내일의 나는 지겹도록 변해간다.
어제와 다른 내가 될 수 있다면 살아 있는 동안 남김없이 쏟아내고 떠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