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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망한 글쓰기

by Ninaland

망했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망함의 징조는 보통 아주 작은 빈틈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한다. 아주 작은 균열을 발견하고 말았을 때 탄식을 내뱉는다. 아, 이번에도 망했다.


근래의 나는 장거리 달리기를 좋아하게 되어서 자주 뛴다. 뛸 때마다 인생이 고통스러운 사람만이 달리기를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기가 끝나고 나서는 생각이 바뀐다. 달리기 하고 나서 보이는 세상을 즐길 수 있는 사람만이 달리기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하튼 달리기를 할 때만큼은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이 고통을 즐기는 사람은 분명 인생이 고통스럽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장거리 달리기를 할 때면 단거리를 할 때와 사실 큰 차이는 없다. 고통을 좀 더 길게 견뎌내면 된다. 차이가 있다면 장거리를 뛸 때 비로소 내 몸의 약한 부분이 어디인지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항상 엇비슷한 신체 부위에서 균열이 느껴진다. 마라톤을 뛸 때면 항상 완주를 목표로 뛰는데, 목표지점을 얼마 안 남기고서 오른쪽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지곤 한다. 달리기를 오래 할수록 더 오랜 거리를 통증 없이 뛰고 나서 아프기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한계점을 지나면 항상 발을 내디뎌 지면을 박차고 나가는 행위에 균열이 발생했음이 느껴지곤 한다. 조금 아프다, 아 이번 달리기도 조금 망했다.


그런데 이 망함은 언제나 조금 망함이지 아주 망함은 아니다. 아주 망했으면 다리를 크게 다쳐 달리기를 못하게 되거나, 더 이상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게 될 터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달리기를 좋아하고 하루이틀 쉬고 나면 또 달릴 수 있다. 점점 뜸하게 망하고, 점점 조금만 망해서 나는 계속해서 달릴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조금 망함을 잊지 않고 나의 약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달리기에 대한 나의 애정이다.


달리기 못지않게 조금씩 망해왔으면서도 애정을 끊을 수 없는 것이 내게는 바로 글쓰기다. 주워 담지도 못하는 말로는 그동안 자주 크게 망해서 이미 소생불가다. 오해를 불식하고자 말을 했는데, 아뿔싸 또 실언을 해서 망해버렸다. 낙담한 시간이 이미 한 세월이다. 그런데 반해 글쓰기는 기특하게도 그렇게 크게 망하지는 않았다. 작은 오해를 불러일으켰어도 그보다 몇 배는 깊은 이해와 위안을 받아왔으니 득과 실을 따져본다면 명백히 플러스다.


심지어 달리기보다도 더 좋아한다. 좋은 이야기와 문장을 읽는 일에 있어 나는 절대 지치지 않는다. 세상엔 평생가도 읽을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분할 따름이고, 그 이야기들에 푹 빠져 읽다 보면 어김없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면 또 조금 쓰는데, 나는 읽는 일에 비해 쓰는 일에 게으른 편이라 또 조금 망한 글쓰기를 하고 만다. 읽는 눈높이를 내 손이 못 따라와 준다. 내가 읽은 문장들은 하나같이 명문이었는데, 내가 쓴 문장들은 글쎄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또 내가 쓴 부족한 문장들을 살피다 보면 그 속에서 내 모습을 닮은 구석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나도 들어 있고 내가 미워하는 나도 들어 있다. 좋든 싫든 이게 나라고 하니 계속해서 쓰면서 다음번엔 진짜 조금 덜 망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조금씩 덜 망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 만족스러운 글쓰기를 할 수도 있을 테고,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나는 이미 글쓰기를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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