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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망할 수 없고 삶도 어쩌면 그렇다

by Ninaland

엄마랑 도망치듯 타이베이로 떠났다. 여름이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었고, 혹시 이번엔 겨울이 오지 않는 건 아닐까 싶을 때 겨울이 왔다. 추위를 벗어나고자 떠난 타이베이는 내가 기대한 대로 여름이었지만, 비가 계속 왔다. 잠깐 오는 스콜도 아니었고, 아침부터 밤에 숙소로 돌아오는 순간까지 미스트 같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기껏 추위를 피해 왔는데 비가 온다니, 시작부터 입이 댓 발 나왔지만 이번 여행을 망칠 순 없다.


엄마의 첫 대만 여행의 안전한 가이드이자 동행자로서 책임이 막중했다. 하지만 이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나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엄마는 이번 대만 여행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괜찮았을지도. 어쨌든 나는 나를 향한 엄마의 시선을 등 뒤로 느끼면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심 로밍을 하고, ATM 위치를 찾고, 이지카드는 어디서 사지? 엄마는 그저 옆에 서 있었을 뿐인데, 나는 식은땀이 났다.


그래서 다음 날은 투어를 신청했다. 오전 11시에 모여 밤 9시까지 가이드와 함께 타이베이 근교 관광지를 둘러보는 버스 투어였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의 전부는 마음껏 생경한 풍경을 엄마와 함께 맘껏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대만 작가 천쓰홍의 소설에는 귀신의 존재를 믿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실제로 대만 사람들은 귀신을 믿는다고 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물건을 절대 가져가지 않는다고, 가져가면 주인의 귀신이 붙어버린다고 생각해 건들지 않으니 분실은 걱정 말라는 가이드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는다.


이틀 정도 비를 헤치며 다니고 나니 우비를 입고 다니는 일에 익숙해진다. 양손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우산보다는 우비가 필수다. 그래야 한 손으로는 카메라도 들고, 한 손으로는 핸드폰으로 길을 찾을 수 있다. 우비를 입고 비 속을 뛰어다니는 일은 꽤나 자유롭지만, 그럼에도 점점 축축해지는 청바지의 무게를 느끼는 일은 불쾌하다. 그래서 대만 고궁박물관 도슨트투어까지 신청했다. 비 오는 날에는 실내에서 전시를 봐야지, 이왕 보는 거 제대로 설명을 들어보면 좋을 테니까.


평일 오후에 시작된 도슨트 투어는 나와 엄마밖에 신청자가 없었다. 방대한 양의 유물들 사이를 하염없이 오가던 중, 푸른 도자기가 눈에 들어왔다. 여요라고 했다. 표면에 균열이 잔뜩 나있는 다른 것들과 달리 하나의 자기만 색이 파랗고 선명했다. 이게 제일 예쁘다고 말하자 도슨트는 그 자기의 용도는 개밥그릇이라고 말해주었다. 도자기를 구우면서 얼음장 같은 무늬가 겉면에 생기는 빙렬은 본디 도자기의 결함이었다. 그런데 특히 푸른 여요를 만들며 이런 무늬가 자주 생기자 이를 하나의 독창적 무늬로 만들었고, 금이 간 무늬가 예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우리 눈에는 제일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여요는 가치가 없다고 여겨져서 동물의 밥그릇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깨진 그릇의 무늬도 문화가 될 수 있다. 결함에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지금 이 여행의 날씨도 그렇다. 비가 오는 추적추적한 날씨도 운치 있는 날이 될 수 있다. 하루를 살아가기 급급한 나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이 서사를 기록할 작가는 나기에 나의 여행은 그리고 나의 삶은 무엇도 될 수 있다. 여행은 이제 더 이상 망할 수 없고 내가 살아갈 삶 또한 어쩌면 그러하다. 비가 그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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