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에 지고 싶지 않을 때

[활자중독 일지] 2021 현대문학상 ‘박형서’의 ‘실뜨기 놀이’

by Ninaland

1.

불행이 다정히 다가오는 시기가 있다. 안면을 바꾸고, 모른 척하고 싶어도 슬그머니 다가와 알은체 하는 불행과 점점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시기가 말이다. 점차 나의 삶이 보폭이 불행의 보폭과 비슷해져 가게 될 때 누구나 문득 두려움을 느낀다. 내가 얘 한테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이러다 평생 함께 하게 되는 거 아닌가.


정중히 불행의 손을 놓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은 단편이 있다. 2021년 현대문학상에서 소개된 박형서 작가의 단편 ‘실뜨기 놀이’다.


2.

사방이 논두렁 밭두렁인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난 소설 속 화자 ‘나’는 가난에 난자당한 표정을 지닌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어릴 때부터 다져진 수많은 전학과 이사로 인해 단련되어 훌쩍 떠나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어딘가에 잘 도착하는 일은 연습하지 못했다는 여자를 만나 결혼한 ‘나’는 고뇌한다. ‘인생은 보통 우리의 장점이 아니라 약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빈곤이 다정한 이 부부를 잊으면 좋았으련만, 이게 웬걸. 공장을 열면 꾸준히 망해가고, 세상의 중심부에서 두 부부는 점차 멀어져 간다. 그럼에도 내가 이 부부의 앞날을 응원했던 건 불행을 맞서는 나’의 태도였다. 빈곤이 점점 더해져 갔다는 그는, 가끔 웃음이 터져 나올 때면 스스로가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서술한다. ‘내가 아는 부자들은 전부 우스갯소리를 하고, 가난뱅이들은 전부 죽는소리만 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인생의 여러 굴곡 속에서 불행에 지지 않으려고, 짐짓 배에 힘을 주고 내뱉는 농담을 나는 좋아한다.


3.

‘나’의 아내에게는 괴상한 말버릇이 하나 있다. ‘인생은 한 번뿐인데.....’ 하고 허공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중얼거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공습경보처럼 느닷없이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들으면, ‘나’는 온갖 불안이 몰려오는 듯이 느껴지며, 마음이 복잡해진다. 심지어 이 부부에게는 아이도 생겼다. 아이의 이름은 성범수. 부모에게 물려받은 가난을 이 아이에게만은 남겨주고 싶지 않았건 만. 그는 ‘이 구린 밑반찬 같은 배경을 성범수가 고스란히 물려받으리라는 예감’으로 미칠 것 같은 감정을 느낀다. (구린 밑반찬 같은 배경이라니, 엄청난 표현력이다.) 아니 인생이 한 번뿐인데! 코스 요리는 아니더라도, 근사한 메인 요리는 맛봐야 하지 않겠는가.


현실에 발을 딛고 있던 이 소설은 이제 소설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근사하게 도약한다. 두 부부의 소중한 아들 범수가 티베트에서 온 승려들에 의해 16대 달라이 라마로 지목된 것이다. 범수가 정말 달라이 라마라면, 그는 의정부가 아닌 티베트 라싸에 살아야 한다. 과연 이 부부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아들을 티베트로 보내 생이별을 겪을 것인가, 인생은 한 번뿐인데!


다소 판타지스러운 전개에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작가는 개연성과 핍진성을 바탕으로 내러티브를 능숙하게 이어간다. 영웅소설의 관습을 적절히 활용해 몰입도를 높이고, 또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구조를 비틀어 내며 재미를 선사한다.


4.

‘인생은 한 번뿐이라면 전생이니 윤회니 하는 게 있을 리 없다. 세계평화를 지키는 달라이 라마가 여러 번 환생할 수도 없고 우리 아들이 관세음보살의 현신일 수도 없다.’


과연 이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맺어질 것인가. 또 다른 활자 중독자들의 원활한 독서를 돕기 위해 책 소개는 여기까지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책을 읽기 시작한 분이 있으시다면 꼭 마지막 문단까지 읽기를 당부드린다. 마지막 문단에서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이 소설을 이 이야기를 하려고 그 먼 길을 달려왔구나 싶을 정도로 먹먹한 문장들이었다.


그리고 책을 덮고 마지막엔 꼭 단편의 제목을 다시 한번 봐주시길. 내가 내뱉었던 작은 탄식이 당신의 탄식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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