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장례식

누구나 겪게 되는 헤어짐에 대하여

by Ninaland


나는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나의 장례식장이 너무 슬픈 분위기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가 기억하는 나의 좋은 모습에 대해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 같다. 작은 축제처럼 즐거웠으면 좋겠고, 음악이 흐르는 그런 공간이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사랑하는 오정희 여사, 나의 외할머니의 장례식장은 어떤 면에서 내가 생각한 장례식과 닮은 부분이 있었다.


2월 말에 할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우리는 각자 어느 정도 할머니의 죽음을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2월 27일 오전 할머니와 함께 사는 삼촌이 쓰러져있는 할머니를 마주했고, 바로 병원에 이송되셨다. 그리곤 내내 입원하신 채로 의식을 찾지 못하셨다. 코로나로 인해 직접 손을 마주 잡지는 못했지만, 나와 우리 가족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할머니가 입원한 병원으로 면회를 갔다. 투명한 유리문을 앞에 두고 10여분의 짧은 면회 시간 동안 우리는 열심히 희망의 징조를 찾아냈다. 할머니가 오늘은 왼손을 살짝 움직인 거 같다고, 눈을 크게 뜨셨다고, 우리를 알아본 것 같다고 앞다투어 말했다.


우리가 만들어 낸 희망을, 우리는 정말로 믿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엄마는 쇼핑을 하면서, 할머니가 입으면 좋을 것 같은 옷을 구매하기도 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퇴원하면 같이 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삼촌은 면회 마지막이면 항상 “우리 엄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는데, 그 외침을 듣고 있을 때면 누워있는 할머니의 모습은 진짜 할머니가 아닌 것만 같았다. 진짜 할머니는 할머니 댁 부엌 식탁에서 내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 앉아 계시고, 삼촌은 과거에 봤던 할머니에게 계속 말을 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할머니의 부고는 날아들었다. 나는 회사에서 편집을 하고 있었다. 아빠는 나에게 전화해서 ‘들었냐고’ 물어봤다. 나는 아무것도 들은 게 없었지만,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아도 내가 들어야 할 소식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못 들었다고 답했지만, 눈물은 그때부터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고, 나는 내가 어디까지 마무리해야 자리를 비울 수 있을지 생각해야 했다. 슬픔은 잠시 유예되었고, 나는 할머니의 부재를 실감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의 친척들이 모여 있었다. 저녁이 되자 할머니 슬하의 2남 2녀의 자식들과 여섯 명의 손녀 손자들까지. 다들 눈은 퉁퉁 불어 있었는데, 막상 만나고 나니 우리는 조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상주로는 처음 자리하게 된 장례식장의 모든 공간에서 나는 할머니의 부재를 느낄 수 있었다.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너무 옛날에 찍은 앳된 얼굴의 할머니 영정사진이 있었다. 그럼에도 다 같이 모여 앉아 있으니, 할머니도 우리 시선 너머 어딘가 앉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장례식장은 일상과는 유리된 시공간이 멈춘 곳 같았다. 누군가 눈물이 터지면 다 같이 오열하기도 하고, 또 금세 서로의 끼니를 챙기며 3일 동안 우리는 할머니를 애도했다. 장례식장 다녀왔다고 하면 꼭 화환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물어보던 할머니를 기억하며, 들어온 화환의 개수를 세기도 했다.


같이 있을 때면 떨어져 있을 때 나누지 못했던 시시껄렁한 일상을 이야기하며 자주 웃었다. 슬픔은 우연히 혼자가 되는 순간 비죽 새어 나왔다. 조문객을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 화장실에 잠시 들어가 있을 때, 그리고 사진첩에서 옛날 할머니의 사진을 찾아볼 때 말이다. 나의 아픔과 별개로 장례식장 밖 일상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데, 그럼에도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가족과 친척의 존재는 별다른 위로의 말없이도 서로에게 너무도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장례식장에 있을 때,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이 식이 끝난 후에 대한 상상할 때였다. 나의 애도가 끝나기 전에, 3일장이 먼저 마무리되기 않기를 바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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