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오답노트가 필요하다

김형경의 심리에세이 '좋은 이별'

by Ninaland

20대 초중반, 가슴 시렸던 이별을 겪고 난 후 한동안 텔레비전을 못 봤던 시기가 있다. 어떤 화면을 틀어도 행복한 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맞이하게 된 이별은 나를 암흑으로 이끌고 갔다. 나는 나 자신을 슬픔 속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는 아주 작은 단서도 지나치지 못하는 탐정이었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단서를 발견해 냈다. 내가 선물했던 것과 같은 브랜드의 모자, 내가 잡던 방식과 비슷하게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연인의 모습, 그리고 함께 봤던 텔레비전 프로그램까지.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눈물 버튼으로 다가왔다.


제일 싫었던 것은 그 당시 인기 있었던 연애 프로그램 <짝>이었다. 짝의 인기를 시작으로 그 당시에는 청춘 남녀가 나와 커플로 매칭 되는 과정을 담은 프로그램이 브라운관에 범람하는 연애 권하는 사회였다. 다양한 매력을 어필하며 썸을 타고, 연애 세포를 자극하는 이들의 모습은 나에게 외치는 듯했다. 누가 나의 짝이 되는가가 인생 가장 중요한 화두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짝을 찾는 과정은 순수하고도 황홀하다. 짝이 되는 그 순간의 맹세는 영원할 것만 같다.


아니 그런데, 과연 그런가? 모두가 첫사랑과 결혼에 골인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이 언제나 짝을 찾는 과정의 행복한 결말이 되어주는 것은 아니다. 첫사랑의 애틋함을 그린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조차 그들의 풋풋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때 영원한 내 반쪽일 것만 같던 짝과의 이별은 어느 순간 우리 곁으로 찾아온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만남만을 중요시 여기고, 잘 헤어지는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 건지 의아했다. 나에게는 이별의 오답노트가 필요했다. 내가 하는 행동들이, 겪는 마음의 고통이 잘 극복해나가고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 당시 나에게 내려온 빛과 같은 동아줄은 다름 아닌 책이었다. 도서관을 방황하다 우연히 골라 집게 된 김형경의 애도 심리 에세이 <좋은 이별>을 읽고 또 읽었다. 만남만큼 다양한 이별의 사례들 속에서 나는 헤어짐에 필요한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책을 읽고 가장 먼저 했던 것은 내 방에서 상대방이 생각나게 만드는 물건들을 하나의 상자 안에 넣어두는 일이었다. ‘유보 상자’였다. 매일 눈에 띌 때마다 하나둘씩 집어넣었고, 침대 밑에 밀어 넣었다. 마음이 정리되면 버리라고 했는데, 도저히 쉽게 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방안에 방치되어 있던 상자는 정말 내 마음이 정리되고 나서야 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한 번의 이별을 극복해냈다. 사실 극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상대방에 대한 마음은 시간에 희석되어 사라졌지만,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나이테처럼 굵고 진하게 마음 한편에 남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상실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의 모습을 찾아갔던 그 힘을 믿기에 조금은 이별을 덜 두려워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나는 다양한 방식의 이별을 겪어왔다. 나는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면 책장 어딘가에서 책 <좋은 이별>을 찾아 꺼내 들었고, 그 안에서 나를 위로할 방법을 찾아 나갔다. 더 이상 이별이 없기를 바라며, 그리고 또 찾아온다면 좀 더 현명히 대응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말이다. 언젠가는 소중했던 만남만큼 더 아프게 느껴질 이별이 많아질 거라 생각하니 막연한 두려움이 들기도 한다. 나만의 이별 오답노트를 적어 내려가며, 적어도 완벽한 오답은 걸러 내는 안목을 갖춰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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