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고 싶은 과거에 대하여

사라지지 않는 숫자 1

by Ninaland

일상의 대부분을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지내는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다. 아마 보통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시절은 바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취준생 시절이 되겠다. 나의 장점과 단점, 가장 도전적이었던 경험, 창의적이었던 경험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무난하게 살아온 인생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내면의 숨겨진 자아를 불러와 겨우 자소서 항목을 완성시켜가던 때, 지금까지 잊지 못할 항목을 만난 적이 있다. 항목은 다음과 같았다. “만약 단 한 번 자신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갈 것인지 선택하고 그 이유를 서술하되, 그 시점에서 당시 상황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계획해 주십시오.”


하나의 질문만으로 나는 책갈피처럼 접힌 내 과거를 하나하나 펼쳐보며 시간여행을 시작했다. 과연 자소서에 등장해도 되는 과거인지에 대한 걱정과는 별개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내가 멈춘 나의 과거는 2014년 9월 21일 오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안방에서 다급하게 엄마를 외치는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119에 전화를 하고 계셨다. 곧 119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구급차를 차고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의사는 건조한 목소리로 ‘뇌출혈’이라는 낯선 병명을 내게 전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끊임없이 후회했던 기억만 선명하다. 엄마가 쓰러지기 전날 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쉽게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을 버거워하며 짜증을 냈다. 짜증을 내지 않았어야 했다. 밥도 못 먹고 늦은 시간 귀가한 내게 카레를 차려주셨지만 먹는 둥 마는 둥 방 안으로 들어갔던 것 같다. 그날 밤, 엄마는 내게 카톡을 보냈다. “딸 밖에서 안 좋은 일 있었니. 우리 딸 파이팅” 새벽에 잠시 잠에서 깨 카톡을 본 나는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짧은 답장을 보냈다. 그리곤 그대로 잠에 들었다. 그때 안방에 들어가 엄마 손을 한번 꼭 잡아드렸어야 했다. 한 달 뒤, 기적과도 같은 경과로 엄마가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온 그날까지 내가 보낸 카톡 메시지 옆에 숫자 1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라지지 않는 숫자 1을 바라보고 있는 것, 나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이었다. 끊임없이 내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누워 있는 엄마를 흔들어 깨울 수도 없었다. 그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적응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 나의 강점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숫자 1 앞에서의 나는 무력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숫자가 사라지는 순간을 상상하며 일상을 살아낼 뿐이었다. 남는 시간엔 주로 이야기에 몰입했다. 가상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며 위로받았다. 그러고 나면 다시 한 줌의 희망을 품은 채 하루를 살아낼 힘을 얻었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과연 지금의 내 기억과 다른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사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리고 돌아간다고 해도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날 짜증 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또 다른 어느 순간, 후회할 만한 행동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과거의 특정한 한 순간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성장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쓰러지기 전에 어머니가 스트레스받을 일이 있었냐’는 의사의 질문에 나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 과거를 후회하며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싶은 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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