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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land Jun 03. 2024

뛰면서 하는 명상

러너로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만큼은 아니지만 요새도 꽤 달리고 있다. 뛰고 오면 조금씩 삐걱이는 몸을 달래가면서. 긴 시간 뛰는 행위를 즐기고 있으니 이쯤이면 뛰는 사람 또한 하나의 정체성으로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디서 인증마크를 부여해 주는 건 아니지만 뛸 때 심장이 뛰니까!


나의 달리기의 관계는 혐관이었다 볼 수 있다. 나는 초중고 때 달리기 시합에서 단 한 번도 꼴찌를 하지 않은 적이 없다. 몇 명이서 뛰든 항상 멀어져 가는 친구들의 뒤통수를 보면서 그냥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계속 꼴찌 하다 보니 그냥 애초에 의욕조차 없었다. 아 달리기, 진짜 하기 싫어!!! 물론 달리기도 내가 좋았을 리 없다. 달리기 주자를 선별하는 순간, 달리기의 여신은 아 얘만은 제외시켜 달라고 기도했을지도.


그런데 내가 오해했던 것은 단거리 달리기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100m 달리기나 계주에서 빠르게 달리는 일은 여전히 나의 영역이 아닌 것 같았지만, 남들보다 오래 달리는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천천히 뛰어 보았다. 여전히 나의 페이스는 느리지만 그래도 뛸 수 있었다. 5k도 10k도, 그리고 불가능해 보였던 21.195km 하프 코스까지도!


느린 페이스로 긴 거리를 뛰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 2시간도 길게 느껴지는데, 30분 동안 한 곳에 앉아서 책에 집중하기도 힘든데, 세 시간 가까이 달린다고 생각하면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막상 뛸 때는 지루하다는 생각은커녕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감각조차 느끼지 못한다. 발을 계속 구르고 있고 거의 관성처럼 움직이고 있다. 땀도 계속 흐르고, 오르막에선 숨이 차기도 하고, 몸 어딘가에서 통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공간에는 뛰는 ‘나’만이 존재하며,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던 사람이나 상황, 기억은 뛰는 순간 시공간 밖으로 밀려난다.


뛰는 순간은 일종의 요가 마무리 동작인 ‘사바아사나’ 같다! 요가 동작들을 마무리하고 바른 자세로 눈을 감고 호흡을 비워내는 사바아사나 자세를 취할 때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각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이대로 영원을 맞이해도 좋을 것 같다는 만족감과 세상과의 거리감이 뛰는 순간에도 그대로 느껴진다.


아, 이래서 달리기를 뛰면서 하는 명상이라고 하는 건가 싶은 순간. 혹시 그렇다면 이때 느끼는 감정이 ‘러너스 하이’인 걸까. 아니다, 무언가 더 남아있다는 기대가 아직 남아있으니 러너스 하이는 곧 나에게 올 것이다. 아 믿습니다, 달리기의 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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