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은 소비를 통해서 실현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현재의 내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현재 나의 위시리스트에 있는 항목은 편광 렌즈로 된 러닝 선글라스, 물속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샥즈 스윔 프로 골전도 이어폰, 1인치 렌즈를 탑재한 오즈모 포켓 3, 그리고 접어서 보관할 수 있는 만두카 에코트래블매트까지.
이는 현재 내가 추구하는 이미지와 원하는 나의 모습을 반영한다. 나는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에 굴하지 않고 나만의 페이스로 달리는 러너, 육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물속을 누비는 스위머, 멋진 퀄리티의 영상으로 또 다른 플랫폼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유튜버, 여행 중에도 언제 어디서든 매트를 들고 다니며 요가를 하는 요기니. 내가 욕망하는 나의 모습이다.
모든 욕망이 추구하는 바가 이렇게 명확하면 선택이 쉽고 후회 없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 이는 쉽게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내려야 할 때 더욱이 그렇다. 넉넉하지 않은 재정 상황에서 주거 안정성을 갖추고 싶을 때라면 어떨까. 나는 영끌을 해서라도 부동산 불패신화를 외치며 입지 좋은 서울에 입성해야 행복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면 현재의 자산 안에서 입지나 서울 접근성을 포기하고라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집에서도 행복할 사람인가. 만약 후자라면 훗날 집값이 폭등했을 때에도 나는 과연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며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사람일까? 정말?!
소비에서 나아가 만약 아예 되돌릴 수 없는 선택 앞에서라면 어떨까. 이를테면 출산과도 같은 상황에서 말이다. 나는 아이를 낳고 싶은가? 부모 세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이 혹시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의지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훗날 출산을 할 수 없는 생물학적 시기에 이르렀을 때도 나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사람일까.
무려 삼십 년도 넘게 나로 살았는데 아직도 나는 나에 대해서 잘 모른다. 나의 욕망과 내가 선망하는 타인의 욕망은 이미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뒤섞인 지 오래이다. 그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주 가끔 찾아오는 찰나의 순간 터져 나온 나 자신의 욕망 한 조각을 토대로 더듬거리며 나아갈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