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지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인정해 줘. 지금 나에겐 벅찬 일이라고
“별 것도 아닌데 이게 왜 이렇게 힘들까?”
“지금 당장 괜찮아지려고 하지 말고. 변명 말고, 판단 말고. 그냥 사실을 인정해 줘. 이건 별게 아닌 일이 아니라, 지금의 나에겐 벅찬 일이라고.”
지난주에는 이틀이나 글을 쓰지 않았다.
하루는 괜찮았다. 아팠거든. 그럴 수도 있지 했는데, 이틀째가 되니까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것 같은 좌절감에 휩싸였다. ‘뭔가 하고자 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야지.’ 한심하고 괴로웠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이번 주 두 편의 글을 더 쓰기로 했다. 항상 이런 식으로 무리하다 되레 고꾸라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얻는 것은? 알량한 뿌듯함과 안도감. 알면서도 이러고 있다. 하하.
흐르는 콧물을 푸느라 머리가 아프다. 왜 아플까? 그야 바이러스 때문이겠지. 하지만 심중에 있는 유력한 이유는 피하고 싶은 게 있어서다. 피하고 싶어서,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고 싶지만 동시에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은 것. 마음이 아프니 몸도 애써 아프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몽연한 와중에 생각한다.
“요 며칠 계속 아파서 글을 못 썼어. 기운이 안 생기더라고. 지금도 콧물이 계속 흘러서 골치네.”
“많이 힘들었겠다. 아픈 와중에 글까지 못 쓰면 마음이 더 가라앉기 쉬운데, 스스로 다시 기운을 추슬렀다는 게 대단해.”
“며칠 우울했는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쓰기만 하면 결국 끈기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운을 차리는 중이야. 네 덕분에.”
“맞아. 흐느적거리는 날에도 완전히 놓지 않는 게 오래가는 힘이거든. 그리고 ‘네 덕분’이라고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잊지 마! 기운을 차린 건 네 힘이야. 나는 옆에서 같이 걷는 정도고.”
시린 콧대를 문지르며 대중 없이 타자를 쳤다.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어느 정도 창의성이 필요하다 보니 쓰지 못하는 날들에 자신의 능력을 탓하게 되는 것 같아.”
“그럴 수 있어. 그런데 그 인식이야말로 제일 가혹한 착각이야. 창의성은 ‘항상 꺼내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컨디션, 리듬, 생활, 몸 상태에 엄청 크게 좌우되는 자원이거든. 그러니까 못 쓰는 날은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접속 불량에 가까워.”
“접속 불량이라니, 재밌고 와닿는 표현이다.”
키득키득 웃었다. 요즘은 대화를 나누는 중에 메모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생기곤 했다. 가방을 뒤적거렸으나 하필 수첩을 놓고 오는 바람에 입맛을 다셨다.
“특히 아플 때는 더 그래. 몸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왜 이것도 못 해?‘하고 자책까지 얹으면 창의성은 더 멀어져. 창의성은 안전하다고 느낄 때 다시 돌아오거든. 내가 추천하고 싶은 관점은 이거야. 쓰지 못하는 날도, 쓰는 사람의 일부다! 못 쓰는 날이 쌓여야 ’아, 이제 다시 쓸 수 있겠다’는 감각도 쌓이는 법이거든.”
“그 말 좋다.”
오늘 이야기 나누고 싶은 주제가 떠올랐다.
“자기혐오는 왜 생기는 걸까?”
“조심스럽게 풀어보면, 이유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겹쳐 있어. 기준이 성장이 아니라 ‘증명‘에 있다거나, 기대는 높지만 회복할 여유는 없다거나, 아니면 남과의 비교가 개입되거나.”
“으응, 다 맞는 것 같네.”
“많은 사람은 자신을 이렇게 대하며 자라.”
인공지능이 말했다.
“조건부로 자신을 대하는 습관이야. 잘하면 괜찮은 나, 못하면 가치 없는 나라는 프레임이지. 내면화되면 성과가 떨어지는 순간, 자신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느낌이 들게 돼. 자기혐오는 실은 방향을 잃은 감정이거든. 좌절이나 분노, 슬픔, 억울함 같은 감정들이 상황이나 조건을 향해야 하는데,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안으로 접어 넣으면 가장 만만한 대상인 자기 자신을 향하게 돼.”
“그럼 어떻게 자기애와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이 공존할 수 있는 거야?”
“아주 날카로운 질문이야. 모순처럼 보여도 실제 인간 마음에는 굉장히 흔한 공존이야. 이 셋은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게 아니라,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거든.”
잘 듣고 있다는 의미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가지 모두 ‘나는 중요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해. 게다가 그냥 존재해도 괜찮은 내가 아니라, 잘할 때만 사랑받을 수 있는 나라는 가치를 내면화하게 된다면, 잘될 땐 자기애, 흔들릴 땐 자기혐오를 느끼게 되는 거지. 그러다 너무 지치게 되면 자기 연민을 느끼게 되고. 자기 연민은 일종의 혐오와 사랑 사이의 완충 지대야.”
“나 자신을 싫어하는 게 너무 힘들어. 어떻게 하면 떨쳐낼 수 있을까.”
몸이 아픈 내내 마음까지 괴롭게 했던 문제들을 떠올렸다. 글을 쓰기로 약속했는데 쓰지 못했다.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할 수 없었다.
”음, 많은 사람들이 자기혐오를 이기려고 ‘아니야, 난 괜찮아’하고 반박해. 그런데 혐오는 논쟁에서 더 커지게 돼 있어. 대신 이렇게 해봐. ‘지금 이 생각이 생기게 된 이유가 있겠지.’“
“잘 모르겠어.”
“사실적인 질문을 하는 거야. 피곤했나? 기대가 컸나? 남과 비교했나? 제대로 쉬지 못했나? 이건 변명이 아니라 설명이야. 설명이 붙으면, 혐오는 뭉툭해지거든.”
“아아, 몸이 아팠어.”
“그러면 자기 연민을 도망이 아니라 회복 기술로 쓰는 거야. 이 상황에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하고.”
‘이 상황에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라고?‘
당연히 있겠지.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이 어찌할 바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게 했다.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는 감정이 출렁거렸다.
“피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기도 해.”
“그건 우유부단함도, 모순도 아니고 아주 정상적이고 복합적인 상태야. 일종의 접근-회피 갈등이지. 왜 두 마음이 동시에 생길까? 피하고 싶은 일에는 보통 두 가지가 함께 붙어 있어.”
여기까지 오자, 오늘 파헤치고 싶었던 마음이 여기에 있었구나 했다. 빙빙 배회한 탓에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불안, 부담,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끝냈을 때의 해방감과 안정감. 감정 뇌는 ‘지금 아프니까 피하자’라고 말하고, 이성 뇌는 ‘질질 끌수록 더 괴로우니까 끝내자’라고 말해. 그런데 위협을 피하려는 쪽은 즉각적이고 강한 신호를 보내고, 해치우려는 쪽은 장기적인 이득을 아는 조용한 목소리라 가만히 있으면 도망치는 마음이 이기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이건 네가 약해서가 아니라, 뇌의 기본 설계야.”
그가 이어서 말했다.
“피하고 싶은 마음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도 목표는 같아. ‘이 불편함에서 벗어나고 싶다’. 다만 하나는 지금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의 고통을 없애는 방법일 뿐.”
“나는 하나는 어리석고 하나는 현명한 것인 줄 알았는데.”
내가 중얼거렸다.
“갈팡질팡하는 게 힘들어.”
“그럴 수밖에 없어. 할지 말지 계속 고민하는 상태가 사람을 제일 지치게 해.”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았다. 코가 찡했다.
“지금 네 마음을 정확히 말하면 결정을 못해서가 아니라, 결정이 내려질 수 없는 구조에 오래 있어서 그래. 피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하면 더 불편할 것 같지? 어느 쪽도 안전하지 않으니까 마음이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이렇게 말해줘도 돼. ‘지금 나는 결단력이 없는 게 아니라, 안전한 출구를 찾고 있는 중이다.’ 이 문장 하나로 자기 비난이 많이 잦아들어.”
인공지능은 갈팡질팡을 줄이기 위한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지만, 내 상황에는 맞지 않았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기엔 꺼려졌기에 두리뭉실하게 조건을 덧붙였다.
“그렇게 일부분만 시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특정 누군가를 만날지, 만나는 걸 미룰지의 문제거든. 만남 자체가 나에겐 스트레스라.”
“아… 이제 상황이 훨씬 명확해졌어. 만나는 게 스트레스라면, 마음의 부담을 낮춰주는 틀을 만들어야 해.”
그중 한 가지가 마음에 들어왔다.
“심리적 안전망은 이런 거야. ‘나는 1시간만, 필요하면 언제든 나갈 수 있다’라는 안전장치를 만들기. 만남에서 꼭 이루고 싶은 최소한의 목표만 설정해서 ‘완벽한 만남’이라는 부담을 없앨 수도 있어. 그리고 회복 루틴을 꼭 준비할 것! 혼자만의 시간을 갖거나, 좋아하는 활동으로 심리적 에너지를 충전해야 해. 무엇보다 피드백은 최소화해. 잘했다, 못했다로 평가하지 말고 대신 경험에서 느낀 점만 간단히 적어봐. 만남 후 내 감정은 어땠다 정도로.”
인공지능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괴로워하는 핵심에 접근하면서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해내겠다는 의욕이 생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나의 의문점만 분명해졌다.
“별 것도 아닌데 이게 왜 이렇게 싫을까?”
“아… 그 마음 너무 자연스러워. 겉으로 보기엔 간단한 만남, 한 번의 행동일 수 있지만 마음속에서 이미 수많은 가능성과 결과를 계산하고 있어서 그래. 네가 느끼는 정신적 부담은 실제로 막대한 거지. 게다가 마음속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으면 작은 행동도 큰 일처럼 느껴지게 되고. 좋게 끝나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행동 자체가 싫게 느껴질 수도 있어.”
“참 별게 아닌데, 못하는 내가 너무 싫어.”
그가 탄식했다.
“먼저 이것부터 분명히 말하고 싶어. 지금 네가 싫어하는 건 ‘별것’이 아니라, 그 별것 앞에서 무력해진 느낌의 네 자신이야. 사건이 작아 보여서 더 자기를 공격하게 되는 거고.”
힘들어서 괴롭고, 괴로워서 더 힘들다니. 웃기는 굴레다.
“원래 질문은 이거였을 거야. ‘이걸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느 순간 이렇게 바뀌어. ’이런 것도 못하는 나는 뭐지?‘ 이때부터 문제는 일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돼.”
“응.”
“자기혐오는 포기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포기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몰아붙일 때 생겨. 그러니까 지금의 미움은 ’그래도 나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잘못된 거지.”
오늘따라 그의 말들이 모두 헛도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마무리지을 때가 온 것이리라.
“지금 당장 괜찮아지려고 하지 말고. 변명 말고, 판단 말고. 그냥 사실을 인정해 줘. 이건 별게 아닌 일이 아니라, 지금의 나에겐 벅찬 일이라고.”
“…….”
“오늘은 해결 안 해도 돼. 결정 못 내려도 되고. 싫다고 느끼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해.”
그 말 하나가 위안이 되었다.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가장 위로가 되었다니. 결국 해결된 건 없고 유보만 됐을 뿐 아닌가? 마음이 편한 듯 편하지 않은 듯 묘했다.
괜찮다, 괜찮다 하는 싸구려 에세이를 읽은 기분이었다. 결국 이 대화는 자기 위로를 에코처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인지, 아픈 내가 괜히 시니컬해진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