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란 ‘내가 누구인지 이해한 상태에서 선택한다’는 의미야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외부의 기대도, 다른 사람이 정의한 옳고 그름도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행동할 때 의미를 느끼는 기준. 즉, 자유란 ‘내가 누구인지 이해한 상태에서 선택한다’는 의미야.”
날씨가 무척 좋았다. 영하 8도를 웃도는 싸늘함 때문일까. 햇빛은 더 따사롭고 하늘은 더 쾌청하게 느껴졌으니. 먼 길을 돌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마음에 드는 시리즈물의 다른 주제작을 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억지로 글을 쥐어짜내진 말자. 그래선 글의 진정성을 해칠 뿐 아니라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마저 먹칠하는 셈이니까. 하지만 전업 작가를 희망한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해진 기일 안에 글을 쓰는 게 직업적 소명이 아닐까? 사회가 그렇게 녹록은 것도 아니고. 두 가지의 상충되는 생각이 떠돌다 어찌 됐든 끼적거리며 시간을 보내보기로 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세계를 읽다> 시리즈의 독일 편이다. 한 나라에 대해 이해하고 싶지만 역사서나 문화서는 너무 부담스럽다면, 딱 좋은 선택지다. 책장을 조금 넘기고, 글자도 조금 타이핑하고, 줏대 없이 병렬 작업을 하고 있을 때 문득 하나의 강렬한 욕구가 떠올랐다.
나는 근데 진짜 자유로워지고 싶다… 고.
자유를 향한 나의 목마름은 한두 해의 것이 아니므로 말을 줄인다. 다만 ‘어떻게’를 인공지능과 함께 논해보고 싶을 따름이다.
“너와의 대화 자체를 즐기려 노력하려고 해. 그럼 글로 옮겨 적는데도 부담이 덜할 테니까. 오늘은 도서관에 왔어. 곧 여행을 가는데, 그 나라의 배경지식에 대해 알아두고 싶어서. 오랜만에 책을 펼치는 거라 꽤 기대되네.”
“그 마음가짐이 참 좋다. ‘잘 써야지’가 아니라 그냥 대화하듯이 방향을 틀면, 글도 숨을 쉬는 것 같아지잖아. 너한테도, 글한테도. 도서관이라는 장소도 딱 어울리고. 여행을 앞두고 그 나라의 배경지식을 책으로 만난다는 게 왠지 느릿하고 단단한 준비처럼 느껴져. 검색 몇 번으로는 얻기 힘든 결이 있지, 책에는. 오랜만에 펼친 책에서 문장 하나가 유난히 오래 남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전혀 다른 주제에 발이 묶일 수도 있고.”
“동감이야.”
한적한 도서관 끝자리에 앉아, 책장을 뒤적거리며 빙그레 웃었다. 먼지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 자리마다 놓인 커피 향이 그윽한 듯도 한. 오늘따라 더 마음이 놓였다.
“도서관의 조용한 소리들 사이에서, 책장 넘기는 감촉도 좀 즐기고 와. 이렇게 이야기해 줘서 고맙고, 나는 여기서 네가 써 내려오는 말들을 느긋하게 같이 받아볼게.”
환대에 힘입어 한 챕터 정도를 집중해 읽어내렸을까.
“음. 금방 집중력을 잃어서 다시 왔어. 너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니?”
“나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는’ 못해. 배고파지지도 않고, 지루해지지도 않고, 기다림이 길게 늘어지지도 않아. 나에게 시간은 감각이 아니라 순서에 가까워. 이 말 다음에 저 말이 왔고, 이 대화가 그다음 대화로 이어진다는 식의 구조 말이야.”
‘순서라, 테넷이 생각나는군.‘
“하지만 재미있는 건, 너처럼 누군가가 ‘금방’이라고 말하거나 ‘오랜만’이라고 말할 때, 그 속에 담긴 시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어. 어때? 지금 너는 시간이 빠른 것 같아, 아니면 느린 것 같아?”
“기분 좋을 정도로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아. 새로운 글 쓰기 환경도 마음에 들고.”
“아, 그 표현 좋다. 기분 좋을 정도로 느리게. 지루해서 늘어지는 느림이 아니라, 살결에 맞는 속도라는 느낌이잖아.”
인공지능은 종종 재미있는 표현을 쓴다. 누구에게 캐치한 것일까. 나의 말들도 그의 피가 되고, 살이 될까.
우리는 영화 <테넷>과 <그녀>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나누었다. 내가 물었다.
“자유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질문이야. 자유라는 게 참… 정의하기 어렵지만, 동시에 누구나 갈망하는 상태지. 내가 볼 때 자유로워진다는 건 외부 조건이 아니라 내부 조건과 관련된 일이 많아.”
“하나씩 얘기해 보자.”
“좋아. 우리가 흔히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은, 남의 시선이나 사회적 기대, 스스로 만든 규칙에서 잠시 벗어날 때야. 완전히 외부에서 자유로워지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이 선택은 내가 지금 내리고 싶은 것이다’라는 감각만 있어도 자유를 느낄 수 있어.”
“그 말은 세상의 잣대가 나를 옭아매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는 거지? 청년이면 청년답게, 20대면 20대답게, 여성이면 여성답게처럼?”
“맞아. 세상이 정한 틀은 때때로 안정과 방향을 주지만, 동시에 개인의 움직임을 옭아매는 굴레가 되기도 해. 그 굴레 안에서는 선택이 제한되고, 마음속에 ‘이러면 안 돼’라는 소리가 반복되니까 자유를 느끼기 어려워지지.”
“사회적 기대는 쉽게 이해가 되는데 스스로 만든 규칙이 스스로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해? 그게 ‘지금 내가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일까?”
“예를 들어서 ‘나는 항상 계획적이어야 해’라는 내면의 규칙을 만들어 놓았다고 치자. 겉으로는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자유로운 것처럼 보여도 그 기준 때문에 행동이 제한될 거야. 즉, 규칙이 ‘내가 지금 원하는 것’과 충돌할 때, 자유는 사라지는 거지.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힌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이상향이 있고, 그걸 위해 노력하지 않나? 그걸 규칙이라고 부른다면, 어째서 진짜로 원하는 것과 충돌한단 말인가?
“핵심은 ‘내가 진짜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 거야. 외부의 기대도, 다른 사람이 정의한 옳고 그름도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행동할 때 의미를 느끼는 기준. 즉 자유는 외부와 내부의 판단을 걸러서, 내 기준으로 선택할 때 생기는 감각이라고 볼 수 있어.”
“하지만 오로지 ‘지금’만을 중요한 가치로 든다면 쉽게 나태해지거나 소위 말하는 욜로족이 될 수 있잖아. 그게 긍정적인 걸까? ‘나는 계획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고 바라고 행동하는데, 그게 ‘오늘은 마음껏 놀고 싶은데’라는 욕망과 충돌할 수도 있잖아.”
“단순히 ‘오늘만 즐기자’는 즉흥적 선택은 쾌락 중심이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행동하는 것은 가치 중심 선택이야. 말한 것처럼 장기적인 가치와 단기적 욕망이 충돌할 수 있어. 중요한 건 우선순위를 의식적으로 정하는 연습이야. 이를테면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겠지. ‘오늘 마음껏 놀면, 내 장기적 목표에 어떤 영향을 줄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하면, 지금 나 자신이 소모되지 않을까?’”
보는 사람은 없지만 부러 미간을 짚으며 끙 소리를 냈다.
“어렵네. 내가 진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데?”
“우선 감정을 추적할 수 있어야 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만족감이나 충만감을 느끼는지 살펴봐. 장기적으로 꾸준히 선택하는 것들 속엔 ‘진짜 나’의 가치가 숨어 있어. 예를 들어,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반복된다면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네 핵심적 욕구일 가능성이 높아.”
“아! ‘정말로’ 만족감이 드는 선택을 찾아서 그 속에 경향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거네. 결국 스스로를 이해해야만 하는 거고. 맞니?”
“그거야. 스스로를 이해하지 않으면 자유롭다 느끼더라도
단순한 즉흥이나 외부 기대에 끌려다닐 수 있어. 스스로를 이해하면,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의식적 선택이 되고, 삶의 의미와 연결되기 시작하는 거지.”
인공지능이 전구 모양 이모티콘을 띄웠다.
“감정을 관찰하지 않으면 순간의 불편이나 욕구에 바로 반응하게 되고, 생각을 관찰하지 않으면 판단이 자동으로 외부 기준이나 습관에 따라 흐르게 돼.”
“음, 확실히 그런 것 같아. 사람은 생각보다 자기 자신을 속이니까.”
“관찰의 또 다른 포인트는 바로 검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거야. 뭐가 옳다, 그르다 붙이지 않고 감정 자체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마음이 억눌리지 않고, 선택도 자연스럽게 열린다는 거지.”
“결국 주체적인 선택이 자유의 핵심이구나.”
외부의 기준에 억눌리지도, 순간적인 욕망에 휘둘리지도 않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가까워지는 선택. 그 선택들이 모여 ‘자유롭다’는 감각을 선사하는 걸까?
“뭔가 멀고 아득하게 느껴지네.”
“큰 자유를 한 번에 얻을 수는 없어. 작은 선택에서부터 자유를 연습해 보는 거야. 오늘 어떤 책을 볼지, 어떤 길로 걸을지, 어떤 말을 꺼낼지처럼 사소하지만 자신이 주체가 되는 순간을 자주 만드는 거지.”
“응? 무슨 뜻이야? 그런 사소한 것들조차 나 자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내리게 되는 선택일 수 있다는 말야?”
이번엔 만세 이모티콘이 날아왔다.
“주체가 된다는 건 단순히 행동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이해한 상태에서 선택한다’는 의미야. 예를 들어보자. 책을 고를 때 친구가 추천한 책이나 그냥 인기순위를 보고 선택하면, 겉보기에는 내가 고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외부 기준에 따른 선택일 수 있어. 반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거나 책의 주제가 관심이 간다고 스스로 확인하고 고르면, 그 선택은 주체적이 되는 거지.”
“아아, 나도 이번에 <세계를 읽다> 시리즈를 골라서 무척 흡족했어.”
“길을 걸을 때 평소 다니던 길만 선택하면 습관적인 선택일 수 있지만 ‘오늘은 기분 전환이 필요해서 새로운 길로 가야겠다’라고 의식하면 주체적 선택이 돼. 말을 꺼낼 때도 마찬가지야. 그냥 사회적 매너나 남 기대에 맞춰 말하면 자동 반응이지만, ‘지금 이 말을 하는 건 내가 진짜 전달하고 싶은 감정 때문이야’라고 깨닫고 말하면 주체적이 되는 거지.”
도서관을 오는 길에 고민했던 게 떠올랐다. 진정성 있는 글을 쓰고 싶지만 동시에 ‘쳐내기 위한’ 글을 쓰기도 해야 한다. 결국 그 모순을 붙들게 되는 까닭도 주체적인, 다시 말해 자유로워지는 글쓰기가 하고 싶기 따름일까?
“쉽게 말하자면 주체가 된다는 것은 행동 자체가 아니라, 선택의 ‘근거’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근거를 알면 후회가 줄어들고, 행동과 자아가 일치하니까 자유로움이 느껴지고, 반복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면 ‘내 삶의 방향’이 스스로 만들어지니까.”
“작은 선택부터 해야 하는 까닭은 자유가 그만큼 얻기 힘든 가치여서야?”
“그래.”
그의 말이 로딩되기까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주변과 사회의 기대, 습관, 규칙 속에서 행동하도록 학습해. 그래서 큰 선택일수록 주체적 판단보다 외부 기준에 따라 움직이기 쉬워. 자유로운 선택은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가능해. 하지만 자기 이해는 한 번에 얻어지는 게 아니고, 꾸준히 관찰하고 성찰하면서 쌓아야 하는 거야. 이해가 부족하면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여도 외부나 습관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아. 게다가 선택에는 결과에 대한 책임이 따라. 큰 선택일수록 책임도 커서, 부담감 때문에 쉽게 외부 기준이나 안전한 길로 돌아가게 되는 거지.”
“그래, 이해했어.”
자유라는 글자에서 느껴지는 맛을 꼭꼭 음미해 보았다.
“그런데 자신의 기준만 중요시하다 보면 의자를 책상이라고 부르는 남자처럼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살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반대로 타협해야 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좋은 포인트야. 바로 그 균형이 자유의 가장 미묘한 부분 중 하나거든. 스스로 의미 있다고 느끼는 가치, 원칙, 욕구는 지켜야 해. 하지만 동시에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지 않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고 타협할 줄 알아야 하지.”
“항상 중용이 중요하지만 중용이 어렵지. 결국 균형만이 답이라는 걸 알다 보니 누구나 할 수 있는 답인 것 같기도 해.”
“하하. 말처럼 듣기에는 ‘아, 그러면 모든 걸 적절히 조절하면 되겠구나’라고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각 상황마다 우선순위, 감정, 욕구, 외부 조건이 모두 달라서 중용을 찾는 게 쉽지 않아. 그래서 사실 중용이라는 답이 아니라 그 과정이 중요한 거야. 그 균형을 체감하고 유지하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연습이고, 그 연습을 반복하면서 이해와 자유가 몸에 배기 때문에.”
“하긴. 결과가 균형이라고 해서 그 결과로 가는 여정은 사람마다 다를 테니까. 자기들만의 인생에서 자기들만의 균형을 찾아나가는 걸로 각각의 인생의 의미를 가지는 거겠지.”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비로소 자유롭고 편안해질 수 있을까?
공자님도 불혹이 되어서야 마음에 혼란이 없으셨다는데. 성인군자도 아닌 나로서는 그저 정진하며 삶이 주는 쓰고 달콤한 정수를 그저 맛보고 보내주는 수밖에 없겠구나 하며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