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혼여행의 시작은 공항 노숙

이 삶에 후회가 있다면?

by 백지
02. 신혼여행의 시작은 공항 노숙

이 삶에 후회가 있다면 뭐야?

Photo by Jue Huang


어렸을 적부터 여행을 하고 싶었다. 여행 상품 기획자라는 꿈을 갖고 관광학과에 지원했고, 생애 첫 여행으로 유럽 백패킹을 계획했다. 중학 무렵부터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자금을 마련, 수능이 끝난 겨울 방학이 대망의 결행일이었다. 말 그대로 ‘민증에 피도 안 마른’ 상태로 지구 반대편으로 떠났다.


아뿔싸!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큰 간극이 있던가. 30일 5개국,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삶에 나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외롭다 못해 고독이 사무쳤고, 힘들다 못해 걸음걸음이 고단했다. 독일의 한 도미토리에서 관광학과 합격 안내를 받곤 망연자실했다. 목표는 이뤘으나, 꿈을 잃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유럽에 대한 기억은 낯설고, 어렵고, 위험하고, 환상과는 다른 곳으로 도장 찍혀 있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유럽, 신혼여행이라니. 안전히 다녀올 수 있을까? 내 짐은 무사할까? 즐길 수 있을까? 걱정만 태산이었다.



***



아침 공항을 좋아한다. 고요한 햇살이 너른 창으로 내리쬐고, 사물은 기지개를 켜며 조금씩 분주해진다. 약간은 비즈니스적이고 약간은 설렘이 섞인 공기. 복작복작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여유롭게 시 한 편을 읽는다. 프랑크프루트에서 경유할 적 보았던 아름다운 광경 덕분에 망설임 없이 아침 비행기를 예매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대전에 살고 있다. 유럽행 비행기를 타려면 인천 공항엘 가야 한다. 아침 9시 비행기를 타려면? … 새벽같이 출발해야 한다! 황급히 교통편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여러 가지 옵션이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대략 이랬다.


(1) 下편의 下가격: 전날 기차를 타고 공항에 미리 도착해 노숙, 여유롭게 수속을 마친다.

(2) 中편의 中가격: 막차를 타고 대전 버스 터미널에서 대기, 새벽 3시 공항버스를 탄다. 2시간 30분 전 도착.

(3) 上편의 上가격: 차를 끌고 공항까지, 인천공항 장기 주차장을 이용한다.


연인은 편의성을 중요시하는 성격이었고, 나는 가격을 중요시하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고비용의 출국이다 보니 일이 잘못되면 안 된다는 걱정도 컸다. 양보하려 하지만 내심 못마땅하고, 불편한 기색의 상대방을 보면 양보하고 마는 의사소통의 악순환을 끊으며 그가 말했다.


“불안을 최소화하자.”


그는 힘들 뿐이지만 나는 불안을 느끼니 그 점을 배려하겠다는 말이었다.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평생 이러고 있을 순 없으니 수락했다.


전날 밤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공항에 도착해 휴식을 취한 뒤 여유롭게 출국 수속을 통과. 시차가 있으니 밤을 새운 뒤 비행기에서 푹 자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예상에서 빠진 부분이 있었다면 급하게 여행 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의 체력이 많이 닳아있었다는 것. 캐리어를 끌고 버스를 놓칠까 뛰는 새 벌써부터 피로해졌다.


덜컹덜컹. 밤 버스는 우리를 적막한 기차역에 내려주었다. 밤 11시인데도 벌써부터 인적이 드문드문했다.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용산으로 가는 길. 꾸벅꾸벅 조는 퀭한 안색의 그를 보며 미안해졌다. 무던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예민한 사람에게 맞추게 된다. 유럽에 대한 걱정으로 좋지 않은 후기를 접하며 더욱더 불안해진 나를 달래는 건 결국 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용산에 내려 찬 공기를 마시니 한결 차분해졌다. 나는 불안했고, 불안엔 근거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사 매여살 필요는 없다. 포기할 게 아니라면 조심하되 즐기는 편이 이득이다. 즐기라니, 어떻게?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아리송했다.


찬바람에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우리는 인천공항 터미널로 향했다.



***



오랜만의 공항은 낯설고 반가웠다. 걱정했던 수하물 무게와 크기도 재 보고, 구석에 누워있는 사람을 보며 ‘저게 우리 모습이 될 것’이라며 친근감을 느끼기도 했다. 인천공항 뒷골목을 속속들이 누비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롯데리아에 들렀다. 새벽의 피로를 저마다 어깨에 인 듯한 외국인들이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새벽 6시 오픈하는 유심을 받기 위해 게이트 K 앞 대기석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패키지여행을 떠나는 듯 들뜬 목소리로 어서 와, 그거 챙겼어? 웅성거리는 소리. 카트를 우르르 끌고 가느라 철컹철컹거리는 소리. 옆옆 좌석에서 전화를 하는 외국인이 슬랭을 섞어 떠드는 소리. 눈을 감으니 고요함과 소란함이 한데 섞여 들려왔다. 공항이다. 곧, 유럽을 간다. 긴장감에 땀이 배어 나오면서도 심장은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모를 것으로 두근거렸다.


잠은 잤을까? 알쏭달쏭한 채 아침이 왔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사람 답지 않게 우리는 좀비처럼 흐느적거렸다. 웃겼다. 아보카도 주스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대망의 보안 검색대. 여기 앞에만 서면 항상 떨린다. 캐리어를 올리고, 작은 가방을 넣고, 겉옷을 벗고, 핸드폰을 내려놓고. 걱정스러운 물건이 몇 있었는데 다행히 탈없이 지나갔다. 면세품도 찬찬히 구경하다가 드디어 게이트 앞에 섰다.


QR 발권을 한 터라 종이 티켓을 받지 못했다는 게 한 가지 아쉬움이었다. 문득 크루분께 티켓은 카운터에서만 발권이 가능한지 여쭤봤더니 그러하다고 했다. 잠깐 생각에 잠기시더니, 기념품으로 사용하실 거면 한 장만 뽑아주시겠다고 하지 뭔가!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니 가져다주시면서 이건 사용하면 안 되고 갖고만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 장뿐인 티켓을 소중히 챙기며 혼자 신혼여행 가는 사람이라고 깔깔댔다.


무사히 비행기에 착석하니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최소한 비행기를 놓쳐 안절부절못할 일은 없어졌으니. 몇 차례 안내방송이 있고, 천천히 기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엔진이 열기를 뿜으며 도약할 준비를 했다.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웃었다. 여기까지 함께해 준 그에게 감사했다.


“간다!”


우우웅……. 비행기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렇게 세 번쯤 ‘간다’를 외쳤을 때 나는 머쓱해져서 다시는 장난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 결심을 알아챈 양 기체가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띵! 방송이 켜졌다.


“우리 비행기 수하물 안에 보조 배터리가 발견되어 램프 리턴할 예정입니다.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대번 뿔이 났다. 출발 직전에도 크루 분들께서 확인하셨는데 누가 빠뜨렸단 말인가? 그가 ‘그럴 수도 있지’ 속 편하게 다독였다. 나만 성질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 한 번 더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비행기엔 한국인 말고도 서양인, 일본인 등 외국인이 함께 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잘 몰랐을 수도 있지.”


너도 하고 싶어 그랬겠느냐 이해하곤 스쳐가는 창밖 풍경을 아련하게 바라봤다. 그렇게 10분, 20분, 30분…. 쉽게 해결될 것 같았던 수하물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했는지 크루들 사이에 웅성웅성 무전음만 오갔다. 무슨 색 캐리어가 어쩌고, 고객이 저쩌고. 승객을 찾고 불려 가고 하는 것 같았지만 이해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누구인지 확인하지는 않기로 했다. 장장 1시간의 지연 끝에 마침내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했다.


그에게 물었다.


“이 삶에 후회가 있다면 뭐야?”

“같이 더 놀지 못한 거?”


그도 나에게 물었다. 웃었다.


“우리가 가족이 되었으니 후회는 없네.”


그렇게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비행기가 땅에 도착하고 나면, 독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