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I help you?
03. 여행 첫날 기차를 놓쳤다
May I help you?
독일의 첫 풍경은 넓고, 숲이 많고, 젖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도착하는 날부터 2~3일은 내내 비가 내렸다. 촉촉한 도로 위로 유도등이 반짝거렸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이었다.
“Are you going to Munchen?”
컴컴한 입국 심사대에서 직원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어벙벙해서 대답했다. 그에게는 여행 목적을 물었던 모양이었다. 신혼여행이고, 이탈리아로 갈 예정이라고 답하니 ‘그래, 독일보다는 이탈리아가 낫지’ 했대서 나중에 듣고는 웃었다.
어딘가 도착하면 처음부터 환대받는 느낌을 주는 장소가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 내 생각으로는 날씨가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오랜 비행, 예상보다 늦은 시간, 미아가 되어 방황하다 보니 체력이 뚝뚝 떨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겁에 질려 있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온통 외국인 천지였다! 여기서 보면 내가 외국인 아니겠냐고 그가 대꾸했다.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고립감과 위협감이 몰려왔다.
현금 하나 없이 여행을 온 P들은 수수료가 무료라는 Sparkasse ATM을 찾아 터미널을 헤맸다. 감사하게도 블로그 리뷰들이 있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출구가 어디고, 에스컬레이터는 또 어딘지. 한국이었더라면 금방 길을 물어보았겠지만 독일에서는 입술조차 뗄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심약한 사람이었던가 또 놀랐다.
가까스로 ATM을 찾아 얼마간의 돈을 인출한 뒤, 호텔로 목적지를 정했다. 공항에서 지하철로 이동해 네 정거장을 가야 했는데, 티켓 뽑는 게 또 어려웠다. 남의 나라 가면 참 바보가 된다고. 블로그를 보며 이것저것 눌러보고 있는데 불쑥 누군가 말을 걸었다.
“May I help you?”
친절하신 현지분께서 내미신 도움의 손길이었다.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눈치챘는가 보다. 어디로 가는지, 몇 명인지 등을 묻더니 척척 이 티켓을 뽑으면 된다 하고 쿨하게 떠나셨다. 문득 서울에서 외국인을 마주할 때 도와주고 싶은데 차마 묻지 못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렇게 간절한 동아줄일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으리라. 나도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었다.
신기하게 생긴 4인석 지하철에 타서, 잔뜩 움츠린 채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으로 향했다. 첫날 숙소는 역사에 바로 인접해 있는 인터시티 호텔이었다. 유럽은 역 근처가 치안이 안 좋은 편이라 일부러 근처를 골랐는데, 혜안이었다 싶었다. 너무너무 지친 까닭에 짐을 부리고 다시 나올 기력도 없을 것 같아 역사 안에 있는 빵집을 들렀다.
독일은 역시 프레첼이지. 재료가 신선하고 치즈가 특히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전광판 수준으로 커다란 호텔 표지판을 따라 걸었다. 기차역은 어둡고 번잡한 느낌이었는데, 서울역처럼 상하로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좌우로 펼쳐져 있어 기차 타기는 편하겠다 싶었다. 역 앞은… 슬럼이라고 해도 의심스럽지 않을 인상이라서 잔뜩 쫀 채 호텔 로비로 후다닥 들어갔다.
셀프 체크인 기계가 있어서 꾹꾹 영문 주소를 입력해 키를 얻어냈다. 우리는 2층이었다. 짐을 부리고 남은 빵을 해치우고 나자, 그래도 여행을 왔는데 콕 박혀 있기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글 리뷰에 유달리 후기가 좋은 한 빵집을 가기로 했다.
독일보단 이탈리아인에 가까워 보이는 직원이 싱그러운 미소로 나를 반겼다. 특히 나를! 빵을 고르고 계산하는 내내 내게는 무척 친절했으나 그에게는 무례하다 싶을 정도라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여성으로서 누려야 하는가 그의 편이 되어 불쾌해해야 하는가…. 고민에 빠져있으니 그는 어쨌든 일행 중 하나라도 편의를 누렸으니 이득인 셈이라고 넘겼다. 나중에 후기를 더 자세히 보니 친절함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이긴 하더라. 미니 샌드위치 하나와 애플파이 같은 것을 먹었다.
새벽 2시 ICE 기차를 타야 했기에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씻자마자 기절하듯 잤다. 당장 4시간 뒤에 일어나야 했다.
***
띠리리링!
번쩍 눈을 떴다. 일어나야 한다는 간절함이 무거운 몸을 꼭두각시처럼 휘둘렀다. 2시에 일어나려 했건만 2시 10분에 깨 후다닥 준비를 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직원에게 체크아웃을 하며 카드키를 넘기고, 아까의 길을 되짚어 역사로 뛰었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조금 여유가 생겨 새벽 2시의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첫 번째 탑승구를 지키고 있는 역무원에게 ‘Halo’를 했다. 그녀는 무뚝뚝했다. 그가 ‘우리 호실은 뒤편인 것 같은데?’하며 출입문을 지나쳐 기차의 꼬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를 따라 걷는데, 웬 걸? 뒤편의 출입문은 모두 닫혀 있지 않나. 의문이 들어 그냥 1호차에 타자고 뒤를 돈 순간, 등골에 소름이 흘렀다. 방금만 해도 출입문에 서 있던 역무원이 감쪽 같이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선 우리를 두고.
“간다…!”
단말마와 함께 1호차의 차창이 내 옆을 스쳐갔다.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를 향해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듯 보였다. 무슨 의미였을까? 잠시 황망하게 서 있다가 그에게 물었다.
“다음 열차는?”
“그보단 일단 호텔에 다시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뿔싸, 우리는 체크아웃까지 다 하고 나온 상태가 아닌가. 로비에서라도 버텨? 일단 이대로 역사에 있는 것보단 안전하겠다는 판단에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대로 ‘그냥 바로 탈 걸…’ 한숨을 푹푹 내쉬고, 나는 나대로 ‘말이라도 해주지…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비교적 빠르게 멘탈을 수습한 덕에(절대 악의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하염없이 아쉬워하는 그를 달래주었다.
‘과연 호텔에 돌아갈 수 있을까?’
오직 이 불안만이 머릿속을 가득 매웠다. 무겁게 느껴지는 캐리어를 끌고 호텔 앞에 도착했다. 다시 한번 청천벽력 같은 상황이 눈앞에 닥쳤다. 문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객실은커녕, 로비에라도 들어갈 수 없다니! 이 새벽에, 중앙역 바로 앞에서, 캐리어를 끌고? 다급히 주변을 살피니 다행히 회전문 옆에 작은 도어벨이 달려있었다. 갈급한 심정으로 벨을 눌렀다.
지르르르, 지르르르.
몇 번의 신호음 뒤에 천만다행으로 직원과 연결될 수 있었다. 이래서 24시간 프런트 데스크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에 가야 하나 보다. 사정을 설명하고 눈물겹게 회전문을 통과했다. 체크아웃을 할 때 봤던 직원분이라면 사정을 설명하기 용이하리라 기대했는데, 하필 프런트에 계신 분은 또 다른 분이었다. 나는 반쯤 로비에 머무를 생각으로 체념하고 있는데, 그가 물었다.
“We checked out a moment a go, but unfortunately missed our train. Would it be possible to return to our room? I would really appreciate your help.”
성격상 그런 요구를 잘 못하는 사람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큰 용기를 내었다고 했다. 간절한 표정으로 직원분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자니 그가 한 번 더 ‘a moment ago?’하고 중얼거렸다.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두 손을 모으고 있으니, 전산을 확인하는 듯하던 직원분이 미소 지었다.
“Here. Good night.”
내 생애 그토록 짜릿한 잘 자란 인사가 있었을까. 그가 건네준 카드키를 소중하게 들고, 다시 가벼워진 캐리어를 달달 끌며 객실로 돌아갔다. 고작 몇 시간 전 처음 봤을 뿐이지만 그곳이 내 집이었다. 홈, 스윗홈! 바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가동했다. 다음 기차를 탈 것이냐? 비용이 만만찮게 비쌌다. 차라리 뮌헨 일정을 취소? 하필이면 취소 불가 숙소를 예매했다.
“버스는 어때?”
Flix Bus를 살펴보니 마침 아침 편이 있었다. 화장실이 불편하다느니, 냄새가 안 좋다느니 하는 안 좋은 후기가 있었지만 감지덕지했다. 여직도 상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를 토닥였다. 차라리 푹 자고 여독을 풀 수 있으니 잘 된 일이다, 만약에 ICE 기차와 Flix 버스가 있었다면 처음부터 버스를 골랐을 것이다, 손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다, 염불처럼 외며 불을 껐다.
남의 땅, 불청객 같은 취급. 한참 그를 위로했지만 나도 혼자가 되니 ‘그 기차를 탔다면 어떤 미래가 있었을까?’ 궁금해지긴 했다. 복잡한 마음과 함께 여행 첫날밤이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