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했던 것들

남자를 찾아서

by Reeh

단단히 다져진 칠흑인지 찰흙인지 모를 다부지고 옹골 친 토기가 서서히 뜨뜻해지다가, 뜨거워지더니, 그 뜨거움이 저 꼭대기에 달 했을 때 그 화마들이 심장 안을 투둑투둑 날 뛰다가 심장의 근육들을 다 뜯고 뛰쳐나갈듯한 갈피 없는 분노가 날뛸 때.


그때가 당시 삼성 수석 엔지니어, 물어 빠져 죽기 직전의 캐러멜 유령의 미소를 머금은.(그의 실물을 본 사람들은 내 말에 완벽히 동의하리라) 하이크 페트로시안이라는 이름의 남자친구가 내게 여행을 간다고 해놓고 내가 전혀 알 수 없도록 차단된 정보 아래에서. 즉 본국으로 돌아가 아르메니아의 현지 약혼녀, 내가 꿈에도 몰랐던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으로 그녀와 함께 돌아오고 난 후 그 소식을 알았을 때였는지,

사귐의 기간이 이미 끝난 후 동생을 임신시킨 그 남자, 당시 아기도 함께 책임 지길 바랬던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던 그 남자,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를 운영하는 둘째 형 사업에 붙어서 입에 풀칠하며 굉장히 기센 이름을 가진 이재왕

이라고 했었나? 양아치의 전형적인 이미지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마치 나는 우리 동네 양아치예요라고 프로필 사진의 그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듯한 신비한 복화술의 마성을 가진, 마치 오징어 중에서는 마른오징어, 반건조오징어, 오징어회, 구운 오징어, 끓는 물에 살짝 데친 오징어 등등 중에서도 버터 위에 다리를 말아 올린 버터 오징어가 본연의 버터 오징어의 아이덴티티가 어떤 것인지 냄새만으로 존재만으로 몸짓만으로 그냥 광고 속 그 이미지 안에서 말없이 그냥! 보여 주듯이, 버터도 없이 초장도 없이 말아 올려진 오징어 다리도 없이도 양아치의 모든 존재의 결정체 그 자체를 다 노골적으로 프로필 사진에서 그냥 보여짐을 생성해 내는 그 잘생긴 얼굴 위에 살짝 서린 천박함이 너무나 찰떡으로 훤히 붙어 있었던 그가 우리 아빠한테" 아저씨 자꾸 전화하지 마세요."라고 외치는 소리를 옆에서 들었을 때였는지.


나는 모르겠다..

어느 안동에 직원들도 없이 친구들도 없이 출장 및 여행을 홀로 다니던 중이었다. 그곳에서 안동 외곽에서 생전 처음 들어본 듯한 혹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어디 누구 씨네 문중 마을의 한 오래된 가옥의 드문 드문 박혀있는 고목들에게 홀린 듯 시선을 빼앗겨 걸어 들어가 남의 집 처마 아래. 처마 아래에서 때마침 떨어지는 빗줄기가 폭우 같았는지 가랑비 같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내가 들숨을 쉴 때마다 내 허파 그득히 들어차던 그 차가운 새벽이슬과 습한 공기는 아직도 생생히 느껴진다. 아직 다 깨지 못한 잠을 잔뜩 머금은 부운 눈을 위로 떠 보니 뿌연 아지랑이가 아련히 물결처럼 커다란 산 머리 위로 넘실대고 있었다.

이마 위로 떨어지던 그 빗방울

내게 괜찮다고 말하는 것을

그때 안 들어서 내가 그 이후로도 항상 우울하고 슬펐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난 그때 자연이 내 이마 위로 손등 위로, 내 눈썹 위로, 내 입가 위로 떨어지며, 적히며 안기며 포개며, 날 위로하는 것을 너무 소름 끼치도록 생생히 느꼈다고 생각했지만, 또 그렇지 못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 사건들 이후로도 오래도록 내 삶을 저주하고 내 뿌리와 내환경과 날 둘러싼 모든 가족과 친구, 직장에 불만을 품고 입술을 실룩거렸으며, 이 뿌리가 상하도록 이를 갈고, 턱주거리가 다 얼얼해지도록 어금니를 걸어 잠그고, 잠을 잘 때는 손톱자국이 나도록 이불을 꼭 붙들고 잤는지는 모르겠다.


어깨 위에 두둑 떨어지는 물방울 위로 내 몸에 서린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너무 분명하게 알려주는 내 살냄새, 게으른 여행 중의 샤워를 건너뛴 이후 더 심해진 그 비릿한 내 살냄새가 날 위로했다는 것도 나는 어렴풋이 알았던가 몰랐던가... 몰랐던 거 같다. 그 빗방울들이 그 살냄새들이 그 귀뚜라미 울음소리들이 그 이름 모른 풀벌레들의 몸짓에 타닥거리며 움찔이고 바람에 술렁이던 무성한 우리들의 늙은 조상들의 풀어헤친 머리카락 같이 생긴 풀들의 흔들림들이.. 그것들이 나 나에게 괜찮다고 하는 말들을.. 난 귀가 안 먹었으니 분명히 다 들었는데.

왜 나는 안 괜찮은 눈빛과 거친 숨소리를 쉬며 분노로 펄떡거리는 심장을 겨우 부여잡고 뛰쳐나가려는 심장을 겨우 주억거리며 담아 내 가슴뼈에 묻어두고서.


나는 살았는데..왜 그렇게 살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으면서도 알 거 같다.

작가의 이전글감정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