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에서 물이 샌다.

2022년 4월 10일 일요일

by 해구

#일기 #물이 새다 #끔찍한 날 #더 끔찍한건 #나 #엄마 #절망 #비참함 #외로움 #멍청



오늘 아침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일요일이었다. 어제저녁에는 재미있는 재난 물소설에 빠져서 손에 땀을 쥐고 읽었다. 아이패드 거치대와 애플 펜슬로 완벽한 자세에서 e북을 읽는 방법도 알게 됐으니 엄청 좋은 일이다. 꿈을 꿨던 것 같은데 며칠 전의 꿈을 생각하면 썩 나쁜 꿈도 아니었다.(며칠 전에는 어떤 나이 많은 노인이 나를 죽여야겠다며 몸싸움을 하는 꿈을 꿨다. 정말 생생한 꿈이라서 떨어지듯이 깼었다.) 아무튼 자연스럽게 9시 즈음에 눈이 떠졌고, 11시에는 알바를 가야 했으니 그것도 좋은 일이었다. 알바가 문제였던가? 학원 알바에서 몇몇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지만, 글쎄.. 결정적인 무언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수업이 끝나갈 무렵부터 머리가 핑-하고 어지러웠다. 몸의 균형이 잘 안 잡혀서 큰일 난 건가 싶었는데, 그냥 지쳤겠거니 하고 둥실 거리는 뇌를 느끼면서 신기해했다.


11시부터 5시까지 수업을 하고 지친 상태로 집에,방에 들어왔다.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방을 열면 제일 먼저 보이는 잠자리에 곱게 놓여있는 내 베개가 오래된 피가 묻은 듯, 검붉게 젖어있었다. 심지어 축축했다! 그 모습이 시각적으로 꽤 충격적이어서 잠시 사고가 멈췄다. 한 일분정도 멍때렸던 것 같다.


정말 피인 줄 알았기 때문에 내 머리에 나도 모르는 구멍이 났나? 나도 모르게 생리가 시작됐나? 생리를 머리통으로 하지는 않을 텐데? 같은 생각을 하면서 냄새를 맡았다.

흐릿한 물비린내가 났기 때문에 약간 안심하고 다음 단계의 생각에 접어들었다.

내가 나간 사이에 엄마나 동생이 뭘 쏟았나? 쏟았다면 왜 안치운 거람? 하고 짜증이 났다. 엄마에게 물어보니 화들짝 놀랐다. 미심쩍었지만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곰곰이 해보기로 했다.


내 방에.. 뭔가 씌었나? 귀신?


사람은 피곤하면 몇 가지 정상적인 사고의 단계를 건너뛴다. 오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몇 시간 쉬고 쓰는 글이라서, 내가 저랬구나.. 할 수 있는데, 저때는 진짜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했다.(시각적으로 검붉개 젖은 배게는 너무 고어틱했다..) 그리고 ...


귀신이면 어쩔 수 없지.


진짜 이렇게 생각했다... 내 사고방식 무슨일이야.?(나 많이 지쳤었구나..)

한숨 한번 푹 쉬고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엄마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약간 정신을 차린 건지 진짜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그래..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원인과 결과가 있겠지.. 하면서 벽에 묻은 검붉은 액체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시선은 오르고 올라서, 천장에 닿았다. 천장에서.. 검붉은 액체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때는 생각이라는 걸 하던 중이라서 그런지 천장에서 녹물이 새는구나 했다. 아무리 나라도 그렇지, 천장에서 피가 떨어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저 정도 의식의 흐름이면 피라고 생각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천장에서 떨어지던 게 피였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피곤한 일이 됐겠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나에겐 천장에서 물이 떨어진다는 사실도 너무 피곤했으므로 대충 수건으로 닦고 누웠다.눈을 감고 숨쉬기를 하는데, 투둑.툭.툭. 소리가 났다.


계속 물이 새고 있었다.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찔끔찔끔 후드득 나오길래 너무 화나서 벌떡일어났다. 수건으로 막고.. 테이프로 붙이고 난리를 떨었다.


의자 위에 올라서서 물을 닦는데 너무 피곤하고 짜증 나서 염새적이게 되었다.

나는 그냥 쉬고 싶을 뿐인데, 왜 이런 일이일어나는거야. 나는 정말.. 쉬고 싶은 것뿐이야..

정말 왜 사람으로 태어나서 삼시세끼 다 먹고 운동도 하고 기분전환도 해야 하고 비타민도 챙겨야 하고 치아건강에 정신건강 사회생활 인간관계 예의 역사 질서교육이딴 걸해야 하는지 모르겠다아아 아ㅏㅏ아아ㅏ가아가악!!!!!!!!!!!!!


살기 싫다!!!!!!!


라고 진취적인방향으로 분노했지만, 지친 몸뚱이는 힘없이 말했다.


살기 싫어..


딱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그때 엄마의 눈을 보고 말았다.

살면서 그런 눈은 처음 봤다. 여기에 없는 다른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눈이었다. 겁에 질려서 불안해하는 어린애 같기도 하고, 아무튼 좋은 눈은 아닌 그런 눈 말이다.


그런 눈을 친모에게서 처음 보다니. 나는 참 멍청하고, 운이 나쁘고, 별로인 놈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조적인 말이 아니라 그것이 사실로 느껴졌다.엄마는 애달픈 목소리로 내가 그때 왜 그래서..라고 스스로를 탓하듯 혼잣말을 했다.그리고 이혼한 아빠의 옛 작업복을 들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뭘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눈을 본 충격에 눈앞의 물구멍들을 막으면서 나는 참 별로다. 이런 생각을 반복했다.


나는 다 쓴 청테이프를 대신할 테이프를 찾으러 다락방에 올라가는 동안 나는 정말, 참, 매우, 몹시 운이 없구나.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란 말이야? 지금 내 친구 한 명은 어학연수를 간 캐나다 파티에서 피곤하다고 그랬고, 또 하나는 돌아버릴 만큼 제정신은 아니지만 남자 친구와 함께하는 날들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또 하나는 주말마다 클라이밍 하러 강남에 나가서 저번 주는 벚꽃도 즐기고 왔던데, 천장에서 새는 물을 닦는 지금의 내가 너무 하잘 것 없이.. 한심하고, 불쌍하고, 못나게 느껴졌다.

다락방에 올라가 보니 물펌프가 들어가 있는 좁고 더러운 구멍 안에 오래된 작업복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마 엄마는 그 안에 들어가서 언제 내 방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물을 닦은 것 같다. 아마 물은 제대로 닦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가사에 소질이 없다..고 하려고 했는데, 그런 것 치고는 잘 해내고 있는 것 같네?

흠... 참. 그렇다.




KakaoTalk_20220410_233022056_02.jpg 수건으로 틀어막은 천장...어이없다

이 와중에 이걸 남기겠다고,, 기분 좀 나아지겠다고 글 쓰는 내가 웃기다. 글을 쓰다 보니 기분이 나아진 내가 더더 웃기다..



오늘도 기묘한 나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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