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일로 만나게 된 남성분이 있었다. 두 번째 만나게 된 분이었는데, 친철하다는 인상이 강한 분이었다. 물론 꼰대 같은 면도 없진 않은지, 내 연애사나, 결혼, 내 전공에까지 물음표를 붙이는 말들을 던졌지만 그래도 친절한 분이었다. 그런데, 딱 하나 지금까지 곱씹게 되는 말이 있다. 휴식시간에 미우라 시온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를 읽고 있을 때였다. 달리기에 진심인 대학생들의 이야기로, 스토리는 절정에 치닫아서 감동의 극단에 치닫는 부분을 읽을 때였다. 나에게 무슨 책을 읽냐고 묻던 그분은 내 책 표지를 들췄다.
“소설이에요.”
젠장, 나도 모르게 주늑든 목소리로 말해버렸다. 급하게 저자의 이름을 감추려고 했지만 눈이 손보다 빨랐다.
“에이-씨. 그거 쪽바리 소설 아니에요?”
나는 이런 반응이 정말 익숙했다. 내가 ‘책’을 읽는다는 사실은 남녀노소 만인이 흐뭇하게 바라보지만 그게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되면 절반쯤은 코웃음을 치거나, 내가 공부를 하는 줄 알았다면서 실망했다. 나는 그게.. 정말... 참을 수가 없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건 내 문제고 일로 만난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허허 웃으며 재미있는 구간이었다면서 능청스럽게 책을 덮었다.
내 능청스러움에도 허술함이 있었는지, 그분은 수습하듯 말했다.
“그래도 책을 좋아하는 건 좋은 습관이긴 하죠. 우리 애들은 영 책을 안 봐서.”
그건 네가 책을 즐기지 못하니까 그런 거잖아. 적대감이 차오른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내 역린을 건들였다. )
자식이 책을 읽기 바라는 부모들 중 대다수가 책을 안 읽는 사람들이다. 책을 즐기는 사람들은 책 읽는 일이 강요하거나 시킨다고 되는 일이 아니며, 그렇게까지 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다.
나는 일이 끝난 뒤에 근처 도서관까지 걸어가서 환상적인 책의 결말을 음미했다. 정말 눈물이 핑돌만큼 감동적이었고, 곱씹을수록 좋았다. 다만 그때 들은 그 사람의 말이 계속 생각이 날뿐이었다.. 그는 친절했지만 싫은 기억을 안겨준 사람이 되버렸다.
다신 만나고 싶지 않다..
전자책
이런 일은 내 삶에서 손에 꼽을 수도 없이 많았다. 몇가지 떠올려 보자면, 초중고 시절에는 버스에서 책을 읽으면 정말 많은 어른들이 말을 걸거나 신기한 듯 쳐다봤다. 그중에는 유난이라는 듯 보는 사람도 있었고 훈훈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겠지. 사실 어느 쪽이든 말을 거는 사람보다는 나았다. 어느날부터는 그 시선이 지긋지긋해서 버스에서 종이책을 볼 수 없게 됐다. 내가 왜 그래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종이책의 감각을 포기하고 전자책으로 건너갔다.
"책 좀 읽어!"
한 번은 교수님이 "책 좀 읽어!" 라고 핀잔을 준 적이 있었다. 교수님이 말한 책은 디자인 서적이나, 유명 디자이너의 저서나, 인문학책을 말하는 거였겠지만..... 정말 억울했다. 소설은 책에 안 끼워주나요? 내가 단언할 수 있는데, 23살까지 내가 읽은 책들은 교수님이 50살까지 읽은 책 전부를 끌어모아도 배는 많을 것이다. 나는 그만큼 책에 파묻혀 살아왔는데!
뭐 이런 것들이다. 책을 읽는 일은 지극히 단순하고 조용하고 혼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할 텐데, 사람들 사이에서는 쉽지 않았다.(교수님 일화는 그냥 억울했던 기억같기도.) 정확하게는 책을 즐기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반칙이야!"
중학생시절에는 나와 같이 책을 읽던 친구가 있었다. 같은 걸 읽고 감상을 나누는 건 정말 중독적이다. 순수하게 즐거웠었는데, 어느 날부터 친구는 내 독서량을 따라갈 수 없다며 책을 읽지 않겠다고 했다. 져서 분하다는 얼굴이었는데, 나는 우리가 무슨 경쟁을 했는지 몰랐다. 시리즈물을 밤새워서 다 읽은 날에는 반칙이야!라는 말을 들었다. 같이 12권까지 속도를 맞춰서 읽고 있었는데, 내가 먼저 읽은게 싫던건 거겠지. 지금 생각하면 귀엽지만.. 그때는 머리가 띵했다.
책을 읽는 사람에게 막연한 이미지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새해 목표 삼대장은 운동, 영어공부, 독서일 정도니까. 유식할 것 같고, 뭐 그렇지 않나. 부모님도 나의 독서는 자랑스러워하셨다.
하지만 늘 책을 읽고 있으니 똑똑하겠군. 지금도 공부하고 있는 건가? 으엑 뭐야! 소설이잖아! 이런 식의 반응은 정말..정말 싫다... 머릿속으로 총을 들거나 주먹을 휘두르거나 절벽에서 밀어버리는 등의 이미지가 지나갔지만.. 실행하진 않을 것이다. 못할 테니까..
이런 일을 계속 겪어도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알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경청할 수 있는 건, 끝까지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책들을 수도 없이 만나봤기 때문이고, 이야기를 폄하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얹지 않는 건 그들의 이해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좋음은 설명한다고 설명되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머릿속으로만 총을 쏘는 상상을 한다.)
고상하게 말을 늘여썼지만 두줄로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니가 뭘 아냐? 얘들이 달리기에 얼마나 진심인지 말을 들어보기라도 했냐고,엉?
애들이 얼마나.... 아 됐어 말을 말자 너 집에 가라.
나는 방금까지 미우라 시온의 [책을 엮다]를 읽다가 이 글을 쓰려고 컴퓨터를 켰다.
거의 다 읽은 시점에서 멋진 감동을 받았고 어떤 확신을 가진채 키보드에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농구는 공놀이, 소설 쓰기는 망상의 나열, 뜨개질은 실놀이고 달리기는 뜀박질이다.
세상에 어떤 일에 뭐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내 소설들을 무시하냐?
나한테 독서는 그냥 정성스럽게 다듬은 말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걸 즐기는.. 그저 문자를 읽고 이해한다는 행위일 뿐이다. 그게 그렇게 이상해?어?! 뭐, 쪽바리? 그래 너한테 중국소설은 짱깨소설이고 일본소설은 쪽바리소설이면 한국소설은 뭐라할거냐? 돌쇠소설 뭐 그런거냐? 아오.
역시나 이야기들이 평가절하 되는 순간들에는 화가 난다. 그래서 여기에 이렇게 글을 쓰며 방 안에서 씨익씨익 거리는 중일 뿐이다. (역시 화내는 것도 활자로 하는게 제일 속시원하다.)
잠깐 진정하고, 그래도 명색에 글이니까 결론을 정리할까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형용사를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완벽한’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데, 그 단어의 허술함이 멋지기 때문이다.
[완벽한]
결함이 없이 완전하다. 흠이 없는 구슬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흠이 없는 구슬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흠이 없다.라고 평가하는 건 누구인가! 구슬의 주인일 수도 있고, 전문성을 갖춘 전문가일 수도 있다. 구슬의 주인이건 전문가건 흠이 없다고 평가하는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 누구든 간에 완벽하다는 말은 지극히 주관적인 의미다. 결함투성이에, 완전함과 거리가 멀지 않나. 바로 그 점이 ‘완벽한’을 완벽하게 만든다.
‘완벽한’은 내 삶에 가득하다. 완벽한 아침식사, 완벽한 친구들 같은 것 말이다.
‘완벽한’ 같은 형용사처럼 세상 어떤 행위에도 명징한 ‘의미’는 없을 것이다. ‘이해하기 쉬운 행위’나 ‘나에게 의미 있는 행위’만 있을 뿐이다.
채식주의자들은 왜 채식을 하는 거야? 글쎄 나는 모르지? 100명의 베지테리언이 있다면 100가지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으니까 집에 가라. 이해받지는 않아도 무시받고 싶지 않다. 어떤 것에 진심인 모든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했으리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아침에도 소설을 썼고 오후에는 책을 읽었다. 내일도 모레도 시즌이 지나갈때까지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 내 소설을 한번 더 쪽바리든 짱깨든 폄하한다면 내 머리속에서 완벽한 총알을 맞을거라는것만 알아두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