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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Aug 11. 2017

<눈물은 왜 짠가>, <긍정적인 밥> 그리고 <성선설>

함민복 #1


함민복의 <눈물은 왜 짠가>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먹어 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 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 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시인. 한때는 안도현이나 <섬진강> 시인인 김용택 시인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나중에는 그들의 시를 읽지 않아도, 가만히 입안에서 시인의 이름만 불러보아도 가슴 가득 따뜻하게 퍼져 나오는 느낌에 그날은 온종일 마음에 파란 꽃물이 드는 것만 같았다. 혹은 어느 사이엔가 깊어질 대로 깊어진 지리산 남빛 산자락을 따라 천천히 구부러져 흘러가던 맑은 섬진강물이 밀려오곤 했다. 그 강의 모래들은 또한 얼마나 곱고 부드러웠던가. 섬진강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거나 강물에 반짝이는 물결들을 가슴에다 넣어두던 순간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화엄사, 그 장엄한 산사(山寺)에 퍼져 나가던 북 소리가 덩덩덩, 마음을 울리곤 했다. 그러다 또 어떤 날은 기형도 시집을 들고 다니기만 해도 낮고 우울하고 쓸쓸하고 상처받은 마음들이 저희들끼리 모여 그르렁거렸다. 살아가는 모양새가 안개와도 같아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흐릿한 날에도 나는 요절한 시인의 시집을 펼치며 차곡차곡 안개의 주식들을 쌓아두었다. 그러면 발목에서부터 검은 탄식이, 알 수 없는 불안들이 저희들끼리 상처 어린 어깨를 기대곤 했다. 그렇게 짧은 시에 기대여 긴 하루들을 건너가던 날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함민복 시인의 시들이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물은 왜 짠가>, <긍정적인 밥>,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가을>, <나를 위로하며>, <봄꽃>, <오래된 잠버릇>, <만찬>, <성선설>, <벚꽃이 피면 마음도 따라 핀다> 등 내가 좋아하는 시들이 그득하다. 이 중 그를 세상에 내 놓은 시 한 편과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 두 편을 먼저 내어놓는다.

  

<눈물은 왜 짠가> 

    

이 시는 제법 긴 산문시다. 그러나 이 긴 시가 힘들지 않고 금방 읽힌다. 마치 수필이나 한 편의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생생하게 이 장면 속으로 금방 빨려 들어간다.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는 것 마냥 자그마한 노모와 남자가 선하게 그려진다. 더운 여름,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시는 어머니가 나이 많은 아들에게 고깃국을 먹자고 한다. 사실은 무더운 여름날 아들에게 고깃국이라도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이 먼저 읽혀 아들은 묵묵히 뒤따라 설렁탕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더니 어머니는 주인아저씨를 불러 소금을 많이 넣어 국물이 짜졌다고 국물을 더 달라고 하신다.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을 때 어머니는 얼른 아들에게 국물을 부어주시고, 아들은 당황해하고, 그 작은 가게 안에서 주인아저씨는 애써 시선을 돌려 외면하고. 결국 민망하고 죄송스러워진 아들은 그만 하시라고 뚝배기로 자꾸만 국물을 부어주시는 어머니의 설렁탕 뚝배기를 툭 치게 된다. 그 ‘툭-’ 소리가 얼마나 서럽던지. ‘나’는 울컥이는 마음을 삭히려 고개를 숙이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먹는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두 모자가 혹시라도 미안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깍두기를 놓아놓고는 돌아선다. 그것도 성냥갑만큼이나 커다란 깍두기를. 그걸 본 아들은 기어이 눈물이 나고야 만다. 표를 내지 않으려 얼른 이마의 땀을 훔쳐 내려서는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 서럽고도 뜨거운 눈물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닦는다. 그리고 시인은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눈물은 왜 짠가”하고.     


어렵지 않게 쓰인 이 시는 ‘투가리’처럼 ‘툭’ 마음속으로 부딪쳐온다. 투가리는 ‘뚝배기’의 사투리다. 설렁탕 국물처럼 진하고 뜨겁고 먹고 나면 든든한, 늙은 어머니의 마음이, 우리에게로 자꾸만 툭툭, 부딪혀온다. 이 시의 말미쯤 가서는 시인처럼, 저도 모를 눈물이 찔끔 난다면 그건 부끄러움이 아니다. 읽고 나면 먹먹한 감동이 전해져오는 이 시는 제법 매스컴에서도 회자되었다. 2년 전 ‘김제동의 톡투유’에서 김제동은 의자가 아닌 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천천히 시를 낭송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마이리틀 텔레비전’ 김구라의 ‘트루 스토리’에서 소개가 되었다. 두 번 다 방청객도, 그리고 게스트로 출연한 여성 출연자도 눈물을 훔쳤다. 진정성이란 그런 것이다. 마음을 다한 것들은, 그것이 글이든, 노래이든, 사진이든, 어린아이의 동시든, 사람의 마음으로 파고들어, 마음으로 ‘툭’ 부딪치는 것이다.

      


가장 받고 싶은 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짜증 섞인 투정에도 

어김없이 차려지는 

당연하게 생각되는 

그런 상     


하루에 세 번이나 

받을 수 있는 상 

아침상 점심상 저녁상 


받아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안 해도 

되는 그런 상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때는 왜 못 보았을까? 

그 상을 내시던 

주름진 엄마의 손을

    

그때는 왜 잡아주지 못했을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을까?

   

그동안 숨겨놨던 말 

이제는 받지 못할 상 

앞에 앉아 홀로 

되뇌어 봅시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 고마웠어요." 

"엄마, 편히 쉬세요."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엄마상 

이제 받을 수 없어요. 

    

이제 제가 엄마에게 상을 차려 드릴게요. 

엄마가 좋아했던 

반찬들로만 

한가득 담을게요.   

  

하지만 아직도 그리운 

엄마의 밥상 

이제 다시 못 받을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울 엄마 얼굴(상)   



작년 전북교육청 공모전에서 동시 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한 어린이의 시. “우리 엄마께서 올해 암으로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가난했지만 엄마와 함께 지냈던 엄마가 차려주셨던 밥상이 그립습니다. 무엇보다 더 보고 싶은 것은 엄마 얼굴입니다.”라는 수상소감이 뭉클하다. 나는 함민복의 <눈물은 왜 짠가>와 <가장 받고 싶은 상>을 읽을 때면 이다지도 눈물이 헤퍼지는지 생각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은 왜 다들 ‘짠 것인가’하고.



가난에 대해서  

   

지금도 그는 돈벌이에는 영 소질이 없다. 그렇지만 그는 한 동안 오로지 ‘전업시인’으로만 살았다. 대한민국에서 온전한 문학가로 살아간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신춘문예로 화려하게 등단했던 소설가 중에서도 남몰래 필명을 바꾼 채 무협작가로, 판타지 작가로 살며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이 많은 현실이다. 무협이나 판타지가 순수문학과 가치가 다르다거나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다만 작가로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거나 혹은 세상살이에 걸맞은 직업쯤은 갖지 않으면 정말 힘들다는 하나의 예시일 뿐.

이토록 척박한 한국 문학계에서 그이는 시인으로만 살았다. 더더군다나 시인 자체가 무척이나 가난했던 사람이었다.   

   

산수 시간에 시계 보는 법을 몰라 나머지 공부를 했다. 집에 시계가 있는 애들이 어처구니없어했다. 시험지 속에서도 시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목에, 미운 마음에 멈춘 시계를 그려보았다. - 강화나들길(http://www.nadeulgil.org) <함민복의 길 위에서>, “둥근 시계의 길”(2016) 중   

   

그가 쓴 “둥근 시계의 길”이라는 10개의 짧은 번호가 매겨져 있는 수필 중 네 번째 단락이다. 시계가 없는 집, 그래서 시계 보는 법을 몰랐던 가난한 이. 

충청북도 중원군 노은면에서 태어나 줄곧 가난하게만 살던 시인은 오로지 “학비가 무료”라는 이유만으로 수도전기공고를 졸업하고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기계라는 것에 적응하지 못해 우울증까지 왔던 시인은 4년 만에 과감하게 퇴사하고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다 대학 2학년인 1988년에 계간 <세계의 문학>에 <성선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8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그 이듬해인 1990년에 첫 시집 <우울氏의 一日>을, 그리고 1993년 <자본주의 약속>을 내놓는다. 그의 초기 시집들은 자본주의 속에서 물질과 욕망에 떠밀리는 개인의 소외와 불통(不通)의 수직적인 현실을 다루었다. 그렇지만 <성선설>의 작가가 어디 가겠는가.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님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성선설> 전문(1988), <세계문학>

      

그의 초기 시집인 <우울氏의 一日>과 <자본주의 약속>에는 가난과 따뜻한 슬픔의 기억들이 함께 한다. 거기에는 서울 변두리에서 돼지를 치는 형수와 시인의 삶이, 아버지의 장례식이, 종합병원이라 불릴 만큼 한쪽 눈도, 한쪽 귀도, 척추마저 아픈 어머니의 삶들이 슬픔 사이로 스며 나온다.      


매형들이 내려왔다

바깥마당 대추나무에 기르던 개를 목매달았다

가마때기가 개를 감싸고 불이 당겨졌다

매형들의 이빨사이에 어머니와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셋방살이가 끼였다

붉은 개 울음소리가 집안 가득 찼다

     

- <붉은 겨울, 1986> 中에서, <자본주의 약속>(1993)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의 가슴 아픈 풍경. 이 풍경들을 가지고도 시인은 ‘긍정’의 힘을 잃지 않는다. 맑은 슬픔들이 그의 등줄기를 세우고, 그는 끊임없이 시를 쓴다. 그렇게 그의 세 번째 시집인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1999)부터 <말랑말랑한 힘>(2005),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2013) 등에서는 시인 특유의 따뜻하고 진솔한 언어들로 우리들의 일상을 감싼다.  



강화도와 시인     


그가 우연히 놀러왔다가 마니산이 너무 좋아서,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를 빌려 강화도에 정착해서 살기 시작한 것이 1996년이니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래서 그는 곧잘 “강화도 시인”이라 불린다. 충청도 태생인 그가 강화도까지 오게 된 데에는 마냥 낭만적인 이유만 있었던 게 아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를 계속했더라면 풍족하진 않더라도 어렵지는 않게 살았을 그가, 이 모든 것을 버린 이후로는 그는 줄곧 가난했다.

그의 삶은 곧잘 가장자리다. 그는 서울의 달동네와 친구네 하숙집을 전전하다 당시 개발 전이었던 일산으로 내려갔고, 일산이 신도시로 되자 다시 밀려 문산으로 갔다. 그러다 문산의 땅값이 치솟자 우연히 들린 마니산에 흠뻑 빠져 보증금 없이 월세 10만원에 강화도 폐가에 정착하게 된다. 강화도 남쪽 끝자락 인천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 그게 그가 처음 갖게 된 강화도의 주소. 도시의 중앙에서 밀려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간 사람. 그러면서도 소박한 웃음을 지우지 않는 사람. 진솔하고 사람냄새 듬뿍 나는 사람. 그가 바로 함민복이다.  

    

그때의 삶은 2003년 동아일보에서 자연 속에서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태우는 문화예술인들을 찾아가는 연재물인 ‘청산별곡(靑山別曲)’의 인터뷰에 잘 나타나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야심차게 시작한 이 시리즈는 불과 3개월만에 총 14편의 인터뷰로 끝나게 된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자연 속에서 치열하게 예술혼만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까닭이 아니었을까 하며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아무튼 그는 동아일보의 야심찬 연재물인 ‘청산별곡(靑山別曲)’시리즈의 첫 번째 인터뷰 작가다. 인터뷰에 의하면 그는 강화도 갯벌에서 일을 하며 아주 조금만 벌어서 시만 쓰고 살았다고 한다. 방이 두 개였던 시인의 집은 며칠 내내 비가 오면 물이 새 걸레로 훔치기 바빴고, 다른 방에는 앉은뱅이 책상 하나와 책꽂이도 없이 책들만 덩그라니 쌓여있기도 했다. 그런 시인의 집 벽에는 시인만의 그림과 낙서들이 즐비하기도 했고, 시인네 집에는 친구들이 결혼하면서 버린 물건들을 하나 둘 주워온 까닭에 마치 재활용품 시장 같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방 두 개에 거실도 있고 텃밭도 있으니 나는 중산층”이라며, ‘늘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한다는 낙관주의자이기도 했다.      


이제 막 강화도에 정착하기 시작했던 시인은, 당시 객지를 떠돌다 고향으로 돌아와 바다 일을 막 시작한 고 선장을 만나, 그의 배를 타고 10여 년 간 바다일을 따라다녔다고 한 수필에서 밝혔다. 그렇게 오랫동안 강화도 노총각으로 살며 갯벌일도 하고 낚시도 하고 배도 타고 산책도 하고, 근처 도시에 가서 시 창작 강의도 하고 마실도 가며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시를 쓰다가 더 이상 먹을 것도, 돈도 다 떨어지면 빨래집개로 방안에 걸어두었던 시를 한 편 급히 출판사로 보냈다는 일화는 참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긍정적인 밥>도 그런 과정에서 나온 시일 것이다.  

        

긍정적인 밥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그의 <긍정적인 밥>을 읽으며, 손으로 활자를 하나하나 더듬으면서 읽다보면, 이 가난하게 살아가면서도 따뜻하고 푸른 바다처럼 푸른 시인의 마음이 한껏 밀려들어온다. 그이의 삶에 대해 하고 싶은 말들이 참 많다. 이 사람냄새 나는 노총각 시인이 드디어 결혼을 했다는 것도, 또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자의 숙명으로 시인이 어떻게 또한 살아가고 시대를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도, 그의 가족- 특히 <눈물은 왜 짠가>의 노모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또 머잖아 가을이 오면 시인 함민복에 대해, 그의 삶과 시에 대해 길게 적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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