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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Jul 28. 2017

해바라기 비명

함형수


해바라기 비명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함형수(1914~1946)





시인 함형수  

   

그의 이름을 아는 이는 의외로 드물다. 마르고 우울한 표정의,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젊은 시인.  남다른 삶의 곡절을 명찰처럼 가슴에 꽂고 살아가야 했던 사람.    

 

그를 정의할 수 있는 키워드는 많다. 뚜렷하고 선명한- 마치 주홍글씨와 같은 짧은 정의들. 그러나 그의 생애를 한 줄로 압축하는 대표 키워드는 잠시만 미뤄두자. 우선은 그의 시에 먼저 초점을 맞추자.     


[비명]

  (悲鳴) 1. 슬피 욺. 또는 그런 울음소리.

        2. 일이 매우 위급하거나 몹시 두려움을 느낄 때 지르는 외마디 소리.

  (非命) 제명대로 다 살지 못하고 죽음.

  (碑銘) 비석에 새긴 글자.    

 

어학사전에 나오는 정의. 제목 ‹해바라기 비명›에서의 1차적인 해석은 당연히 ‘碑銘- 비석에 새긴 글자’다. 태양을 닮은, 태양의 꽃, 해바라기에 새긴 비명(碑銘). 차가운 비석, 차가운 죽음과 대비되면서 더욱 강렬해지는 노오란 비명들.

아이러니하게도, 혹은 몹시 안타깝게도 이 시의 제목 ‹해바라기 비명›은 3가지 의미로도 모두 읽힌다. 다만 ‘일이 매우 위급하거나 몹시 두려움을 느낄 때 지리는 외마디 소리’라는 의미보다는 ‘간절함’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라는 느낌이 보다 가깝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시 <해바라기 비명>과 뭉크의 <절규>를 연관 짓기도 한다.

    

에드바르 뭉크. 노르웨이, 북유럽의 낮고 음울한 세계를 지녔던. 유화와 더불어 판화작가이기도 했던, 죽은 이후 더욱 위대한 ‘국민화가’가 된 사람. 붉은 빛으로 가득 찬 일그러진 하늘과 일그러진 검은 인물. 그 생생한 절망. 뭉크의 <절규> 앞에 멈춰서본 적이 당신에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바라기 비명›은 그보다는 ‘가볍다’. 이 가벼움은 경박함이 아니라, 조금 더 ‘삶’에의 ‘열망’을 가진 ‘노오란’ 그 무엇. 그리고 ‘뜨겁고 화려한 나의 사랑’이자 푸른 청보리밭 사이로 날아오르는 작은 새와 같은 ‘나의 꿈’     


그래서 이 시에는 뭉크의 <절규>보다는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더 자연스럽다. 가난하고 불우했던 환경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고흐의 거칠고 거침없는 화풍처럼, 가난했던 시인 함형수의 ‹해바라기 비명›도 거침없고 정열적이다.     


이 시의 울림을 더욱 크게 만드는 데에는 ‘청년 화가 L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주는 무게가 있다. 해바라기를 사랑하고 정열적으로 삶을 살다 간 청년 화가 L. 시의 화자를 요절한 청년화가 L로 설정함으로써, 그의 불꽃같은 짧은 생이 이 시에 생생한 무게감을 더한다. 1936년 <시인부락> 창간호에 실렸던 이 시의 부제를 놓고, ‘청년 화가 L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의문들이 분분했다. 이중에서 당시 서양문물을 급격히 받아들였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아마도 청년 화가 L은 빈센트 반 고흐일 것이라는 의견이 현재까지도 가장 크게 제시되고 있다. 그의 삶의 궤적이 ‹해바라기 비명›과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생전에 총 15점의 해바라기를 그릴 만큼 해바라기를 사랑한 화가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해바라기>의 화가라고 부르곤 한다. 특히 그는 똑같은 화병에 꽂혀있는 <해바라기>를 연작으로 그릴만큼 그 노오란 꽃들을 사랑했다.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색채, 꽃송이, 배경 등 조금씩 다른 이미지로 그려진 <해바라기> 연작들. 이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은 1889년에 화병에 꽂힌 15송이의 해바라기를 그린 작품이다. 배경도, 화병도, 커다란 해바라기들도 캔버스 가득 오로지 황금빛으로 빛나는 <해바라기>.


@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캔버스에 유채, 95 x 73 cm, 반 고흐 미술관


그러나 유명세와 무관하게 금방이라도 화폭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이 생생하게 살아 넘치는 생명력만큼은 고흐의 어떤 작품에서든 우위를 가릴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 어두운 삶에서 희망을 노래했던 고흐. 태양을 쫓아 네덜란드에서 프랑스 파리로, 파리에서 다시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옮겨가며, 같은 구도를 가진 무려 7점의 노란 <해바라기>를 그렸던 고흐. 그의 삶에 대한 희망은 강렬하게 덧칠된 ‘노란색’이었다. 어쩌면 그는 시 <해바라기 비명>에서의 화자 그 자신이라고 해도 될 만큼 시와 동일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함형수의 시를 소개할 때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같이 소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시대와 장소를 달리 한 이들이지만, 시인과 화가라는 예술가의 숙명 아래 한 작품 안에서 이들의 운명이, 서로가 가진 울림들이, 맞물려 더 커다란 파문으로 다가오는 시 <해바라기의 비명>. 이 울림은 시가 지상에 발표된 지 80여년이 지나도 여전하다.     


어떤 이들은 조심스럽게 청년 화가 L이 고흐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갔던 일제 강점기 ‘천재화가’ 혹은 ‘조선의 고갱’이란 찬사를 들었던 이인성(1912∼1950)이 아닐까 말하기도 한다. 이인성은 18세 때 이미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천재 화가로 불과 24세에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고갱’을 연상케 하는 화풍을 지녔는데, 동양적인 시각으로 한국적인 느낌을 잘 살려 서양화, 수채화, 유화, 동양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그의 재능을 발휘했다. 그런 이인성의 그림이 함형수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들.     


그러나 청년화가 L이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함형수는 한 때 <해바라기의 비명> 단 한 편만을 남긴 시인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그만큼 현재까지 남겨진 그의 작품은 몇 되지 않았고, 그가 한국문학사에 끼친 영향은 미미했으나, 동시에 그만큼 그의 시 <해바라기의 비명>이 가진 울림이 컸다는 의미다.

공식적으로 그는 1936년 <시인부락> 창간호에 <해바라기의 비명>을 실었고, 194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마음>으로 당선되었다. 23살, 스물을 갓 넘긴 젊디젊은 청년이었던 함형주는 당시 22살이었던 미당 서정주와 함께 서울 통의동에 있는 보안여관에 기거하면서 젊은 그들의 가슴 속 열망과 희망, 절망과 불안을 토로하며 함께 시를 쓰고 문학을 꿈꿨다. 시인 동인지 <시인부락>은 그렇게 나오게 된다. 바로 그 시절, 허름한 여관에서 문학을 꿈꾸던 23살 청년이었던 그는 <해바라기의 비명>을 적었다. 참고로 통의동 보안여관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으로 80여년의 역사를 지녔으며, 오늘날에는 옛것과 현대가 유니크하게 잘 어우러진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유명한 명소이기도 하다. 경복궁을 지나게 된다면 한번쯤은 들려도 좋다.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그가 공식적으로 남겼다고 알려지는 시는 고작 10편에서 17편. 그나마도 습작 수준이 대다수다. 그의 이름으로 된 시집 한 권 갖지 못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슴 속에 와 닿는 한 편의 시, 단 한 편의 절창(絕唱)을 남기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갔다. 어떤 문학가가 “많은 시인들이 시집을 냈어도 그들은 단 한 편의 <해바라기의 비명>을 갖지 못했다.”라고 평을 했을 만큼, 시 <해바라기의 비명>은 많은 이들의 마음에 오래토록 남아 있다.    



소망의 또 다른 이름간절함   

  

5행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시는 모두 명령형 종결어미로 끝맺고 있다. ‘나의 무덤에는 차가운 비석을 세우지 말라’,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나의 사랑이라고,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그렇게 그는 ‘나의 죽음’이 아직 끝이 아니라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명(命)한다. 그것은 ‘명령형’으로 드러나는 시인의 끝없는 간절한 소망의 다른 이름.     


<해바라기 비명>이 우리에게 절절하게 다가왔던 이유 중 하나는 시인 자신이 ‘화자’가 되어버린 까닭이다.     


33세. 해바라기. 정신착란. 요절. 

      

이것이 그의 생애를 한 줄로 표현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그는 짧은 생애 내내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고달픈 시간을 짊어져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시를 쓰고 하모니카로 드리고의 세레나데를 불었다. 이렇게 멋을 아는 시인이어서인지 그가 함경도에서 서울 통의동과 성북동으로, 그러다 생활고로 다시 만주로 건너갔을 때, 만주에서 한 여배우와 열애에 빠져 동거를 하기도 했단다. 그러다 사랑에 실패하고 한동안 낙담에 빠져 있다가 해방 후 고향인 함경도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 후 오래지 않아 그는 심한 정신 착란에 시달리며 고통 받다가 1946년 북한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죽음의 모양새가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인은 학교를 중퇴하고 노동자 숙소를 전전할 때에도 하모니카와 손때 묻은 시 노트만은 꼭 들고 다녔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 아프다. 


그가 주로 썼던 시들은 ‘소년’ 그리고 ‘소녀’에 관한 시들이 많았다. 말랑말랑한 시들이 ‘소년행’이라는 이름들로 붙여졌고, 시인 함형수는 이제 막 두근거리는 연애에 눈뜬 시들을 제법 써내려갔다. 그의 깡마른 체구 안에 고여 있었을 여리고 순한 심성들이 찰랑거리듯 눈에 선하다.  

   

내만 집 안에 있으면 그애는 배재밖 전신(電信)ㅅ대에 기댄 채 종시 들어오질 못하였다. 바삐 바삐 쌔하얀 운동복을 갈아입고 내가 웃방문으로 도망치는 것을 보고야 그애는 우리집에 들어갔다.

인제는 그애가 갔을 쯤 할 때 내가 가만히 집으로 들어가 얼굴을 붉히고 어머니에게 물으면 그애는 어머니가 권하는 고기도 안 넣은 시라기 장물에 풋콩 조밥을 말어 맛있게 먹고 갔다고 한다.

오랜만에 한번씩 저의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우리 집에 오든 그애는 우리집에 오는 것이 좋았나? 나뻤나?

퉁퉁한 얼굴에 말이 없든 애 ― 그애의 이름은 무에라고 불렀더라?     


이 시는 청년 함형수가 적은 <그애>라는 제목의 시 전문이다. 내가 집 안에 있으면 차마 못 들어오고 전봇대에 기대여 있다가, 내가 웃방문으로 도망치면 우리 집에 들어오던 그 애. 그 애가 갔을 즈음에야 겨우 다시 집으로 들어와 얼굴을 붉히며 어머니께 그 애에 대해 물어보는 나. 우리 집에 오는 것이 좋았나? 나빴나? 두근거리는 나. 조금은 어설프고 오래 된 표현을 조금 걷어내고 바라보면, 이 시에는 보기만 해도 볼이 빨개지는 사춘기 소년, 소녀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그랬던 그가 <해바라기 비명>에서는 생명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단호하고 힘찬 어조로 나타낸다. 어떤 면에서는 무척이나 열정적이고 낭만적이기도 하다. 더구나 해바라기의 노란색과 보리밭의 푸른색을 대비시킨 강렬한 색채효과를 통해 더욱 생생하고 풍성한 생명력과 삶에의 의지를 강렬하게 표명한다.     


소년다웠던 감상과 애수를 지녔던 그이가, 다시 강렬한 어조로, 그러다 사랑에 실패하고 정신착란을 겪기까지, 평생 동안 그를 따라다녔던 생활고 속에서 얼마나 피폐해져갔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가 맞이 한 죽음의 순간이 많이 쓸쓸하지 않았기를 바래본다.  

        


다시 보리밭

     

보리밭 사이를 걸어본 적이 있는가. 지난 5월. 나는 전북 고창 청보리밭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혼자 하는 여행이란 제법 홀가분하기도, 혹은 외롭기도 한 것이어서 무작정 떠나는 발걸음은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도착한 고창의 보리밭은 평야 위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보리밭 사이로 난 산책길을 따라 걸었고, 내 곁으로 연인들과 가족들이 지나쳐가곤 했다. 서울에서 제법 멀리 내려왔지만 여전히 혼자였다. 걷고 걷다 보니 보리밭 한가운데 있던 호수에 다다르기도 했다. 그동안 도시에서만 살아와서 그런지, 실제로 가까이서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부드럽게 흔들리는 보리들. 그 푸른 바다와 같은 물결이라니. 연두빛이었으되 바람에 따라, 공기의 결에 따라, 햇살에 따라 끝없이 바뀌던 그 빛들 속에, 그날은 슬픔도 따스해져갔다.    


그래서 일거다, 시인이 해바라기 줄기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이 보이기를 바랬던 것은. 그토록 가슴을 일렁이게 만드는 물결들은 우리의 삶을 멈추게 한다. 비탈길로, 혹은 어두운 골목길로만 주저앉던 가슴들을 일으켜 다시 잘그락거리는 삶의 잔잔한 기쁨들을 우리에게로 가져다준다.     


시 <해바라기 비명>에서 시인은 해바라기와 푸른 보리밭을 보여 달라고 한다. 사실 해바라기와 보리밭은 서로 다른 계절 속에 있는, 결코 겹쳐질 수가 없는 존재들이다. 그렇지만,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남아있는 자들의 간절한 의지’.     


그래서 해바라기가 피어나는 이 뜨거운 여름날이면, 나는 황홀한 시 한 편을 남기고 떠난 시인을 생각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는 노랫소리 하나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이런 날에는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는 그의 마지막 구절이 가슴 속으로, 성큼 들어서는 이런 날에는, 당신의 웃음 한 조각마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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