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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May 11. 2017

청포도 그리고 광야

이육사


이육사의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시인의 시들은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아프다. <광야>에서의 드넓은 옹혼함과 고고함을  사랑했으며, 당시 시대적 상황과 그가 겪는 극한상황이 맞물려 <절정>, 8행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가 마냥 무거웠던 기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늘 아프다.


<광야>나 <절정>의 무게보다 그나마 조금은 더 청량하게 다가오는 시가 <청포도>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리고 이 시는 그의 시 중에서는 드물게 꿈을 꾸듯 아름답기까지 하다.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라니. 나는 유난히도 하늘이 푸른 날이면 종종 이 구절들을 떠올렸다. 그러면 마음속으로 천천히 물결처럼 따스함과 위안이 밀려왔다. 조금은 더 푸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일제강점기하에서 광복과 희망을 노래하는 이 시는 고단함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특히 시의 첫문을 여는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는 구절이 주는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 이 짧은 2줄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유년시절, 혹은 청년시절의 평온했던 고향이 주는 그리움과 평화로움을 그대로 끄집어낸다. 이 짧은 두 줄이 환기시키는 것은 너무나 많다. 푸르게 익어가는 청포도 아래 뛰어놀던 어린 시절, 그 햇살과 푸른 숲과 곧은 나무들, 초록의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풍성함과 싱그러움. 청량한 웃음.


그 어딘가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인자하신 외할머니의 품도 남아있을 것이며, 자전거를 타고 가던 시원한 바람의 오후도 남아있을 것이다. 두고 온 것들이 주는 아름다움은 언제나 생을 흔든다. 우리는 마음 한 구석에 평온하고 반짝였던 추억들 하나쯤은 넣어놓고 산다. 유리병 안에 담긴 작고 동그란 사탕 같은 기억. 우리들의 소년기. 내게는 여름방학 먼 친척집이 있던 부산의 골목과 골목 어디쯤을 뛰어다녔던, 뭉게구름 같던 여름날.


그게 시인 이육사에게는, 두고 온 그의 고장, 청포도가 익어가는 푸른 칠월이었을 거다. 이육사 시인의 고향은 지조 높은 선비들로 유명한 경북 안동. 정확히는 안동 도산면 하고도 더 깊숙이 들어간 마을 원천리. 마을 이름에 ‘川’가 들어갈 정도로 낙동강과 가까운 곳. 넓은 강변에 쌓인 모래가 지친 마음을 품어주는 곳. 은어떼가 사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가을이면 억새가 우거지는 풍광 속에서, 마을 뒤편 위치한 왕모산에 뛰어놀면서 시인 이원록(본명)은 자랐다. 그의 호 육사(陸史)가 그의 나이 24살에 투옥된 죄수번호 ‘264’에서 따왔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


스물을 갓 넘긴 시점, 이곳저곳을 여행 다니던 나는 안동 하회마을에 잠시 들린 적이 있었다. 칠월이었고, 초여름이었다. 가벼운 챙이 있는 모자로도 초여름의 햇살이 다 가려지지 않는 맑은 날이었다. 가벼운 배낭을 짊어진 어깨와 짧게 드러난 팔로 감기는 시원한 바람이 좋았다.

곳곳에 세워진 한옥의 정갈한 기왓장과 돌담들, 오랜 세월이 깃들어 있는 솟을 대문, 초가집들의 아담한 정취. 그리고 이름 모를 들꽃과 백일홍의 붉은 꽃잎에 마음이 머무는 곳. 그 모든 것이 좋았으나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 여름날 이후로도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풍경은 하회마을에서 조금 벗어나면 바라보이는 모래강변, 그리고 마을을 둘러싼 낙동강의 강줄기였다.

마을을 빙 둘러싸고 흐르던, 느리고 넓고 깊은 강물. 그 기다란 강줄기. 남한에서 가장 긴 강. 강원도 태백시에서 발원하여 부산으로까지 흐르는, 천릿길도 훨씬 넘는 그 긴 강이 마을을 둥글게 휘감아나가는 모습. 관광지가 되어버린 하회마을에 북적이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지 않던, 마을의 외곽에서 나는 오랫동안 그 강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날들을 꿈꾸며

     

몇 년 전, 이육사 시인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가 나온다고 해서 주의 깊게 봤던 기억이 있다. 이육사 시인은 처절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사람이라, 광복절 특집 드라마 속에서 그려지던 이야기에서도 독립운동을 떼려야 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육사 시인의 커다랗게 굴곡진 삶을 겨우 2편의 드라마 속에 모두 밀어 넣어야 했던 까닭에 일부 엉성한 얼개가 눈에 띄긴 했지만 이육사 시인의 생애 자체가 이미 커다란 울림을 지니는 터라, 드라마는 2012년 미국 휴스턴 국제영화제 특집극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때 나는 일과 관련해서, 이육사 시인의 시 제목을 따서 만든 드라마 <절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봐야 했었다. 그 중 한 조연의 대사가 유독 기억에 남았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있는 이 나라는 항상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어요. 일본의 지배 속에 있지 않은, 독립된 조국이란 걸 한 번도 본 적조차 없는데, 그게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되지가 않는데, 이런 우리들이 과연 ‘광복’이란 걸 꿈꿀 수 있을까요?”


시인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이육사에게 이렇게 반문했던 한 여성은 조국광복을 위해 일했지만, 결국은 변절하여 오히려 일본의 편에서 서서 일본제국주의를 위한 징병모집에 앞장서게 된다. 마음을 울리는 여러 포인트들이 제법 있었던 드라마였지만, 나는 이 대사에서 한 동안 머물러야 했다.

 

1910년 한일합방. 1945년 해방.


이렇게 역사 속 짧은 한 줄로 기억되던 일제강점기. 그러나 나는 그 동안 단 한 번도 그 치욕의 시대에 태어나 유년기와 청년기 전부를 보냈던 이들의 삶에 대해서는 미처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이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머리를 망치로 두드리는 것 같은 강한 충격을 받았었다.

그저 누군가는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했었고, 또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변절을 했던, 우리나라의 한 어두운 시기로 기억했던,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에 울분을 토하기도 했었으며, 시기별로 문인들의 특징과 작품들을 읽어 나갔던, 내게는 ‘활자’로 먼저 다가왔던 시기였다. 당시 시대의 참상에 마음 아파하긴 했으나, ‘한 번도 독립된 조국을 본 적도 없는’ ‘청춘’들이 가졌을 그 암담함에 대해, ‘보지 못했던 것’을 꿈꾸고 이를 위해 투쟁해야 했던 35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쳐 갔을 청춘과 젊음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알지 못했으므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이 드라마를 집필했던 작가는, 상상력을 통해, 허구 속의 인물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짧은 대사 하나로도, 미처 알지 못했던 시대의 아픔들이 되살아나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암울함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뜻을 꺾고 시류에 영합해나가던 중에도, 홀로 변함없고자 했던 시인 이육사의 고뇌에 대해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동시에 그 시대의 청춘들에 대해, 그들이 ‘보지 못했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대’에 대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했던, 그 청춘들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시대와 나’의 연관성에 대한 물음들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시인의 삶

     

허구와 상상이 가미된 드라마 속 유약했던 이육사와는 달리 실제 이육사의 삶은 훨씬 더 꼿꼿했다. 물론 그는 드라마 속에 그려진 것처럼 양복을 즐겨 입었고, 동그란 안경에, 잘 다듬은 머리로 멋을 내기도 했다. 승마와 사격에 능했으며, 인근에 널리 소문이 날 정도로 여섯 형제간의 우애도 남달랐다.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손이었던 시인의 집안은 대대로 유교를 숭상해왔으며, 절개를 지켜왔다. 그뿐이 아니라 독립운동 하는 이들의 연락처가 되었던 만주의 ‘일창한약방’을 운영하던 이가 바로 그의 외숙들이다. 이육사 역시 이러한 가풍 속에서 자연스레 형제들을 따라 22살에 의열단에 가입한다. 치열하게 독립운동에 앞장서던 그가 투옥되었던 횟수만 무려 17회. 37세에 얻는 폐병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는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그토록 바라고 염원해왔던 조국의 독립을 불과 한 해 앞두고 이육사 시인은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 40세라는 짧은 생애로 낯선 이국 북경의 지하 감옥에서 숨졌다.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쓰레기와 잡초와 버려진 물건들로 어지러운 곳. 그 속에서 그는 고통스럽게 고문을 받으며 악화되던 폐병 속에서도 시를 쓰고 또 썼다. <광야>는 그때 쓴 시다. 그리고 시인은 가혹한 고문을 받던 중 결국 목숨을 잃었다. 차갑고 매서운 겨울 새벽이었다.


살아생전 그가 남겼던 시는 겨우 36편. 그것도 습작까지 모두 포함한 숫자다. 만약 그가 제대로 생을 누릴 수 있었다면 더 많은 감동을 주는 시들을 지었을 거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미 <광야>, <절정>, <청포도> 이 3편만으로도 그가 가진 시의 힘을 잘 알 수 있었으니. 그래서 더더욱 안타깝다. 더욱이 고문을 받으며 감옥에서 힘겹게 지내던 중에 쓴 <광야>를 읽을 때마다 나는 소름이 돋는다. 꼿꼿하고 부러지지 않던 그의 생애를 관통하던 신념의 힘과 무엇보다도 죽음을 직감했을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시인의 의지가, 그 높은 기개의 향기가, 나는 몹시도 놀랍고도 먹먹하다.


시인의 죽음 후 홀로 남은 부인은 그때부터 흰색의 무명옷을 입었다고 한다. 곱고 화려한 색색의 비단옷을 짓는 삯바느질로 연명하며 어린 딸을 키워냈으나, 그녀 자신은 죽을 때까지 상복과도 같은 흰 무명옷만을 입었다.

그렇게 시인이 죽은 후 그의 집안은 완전히 몰락했다. 비평가며 신문기자 등 당대에 이름을 날렸던 그의 다재다능한 형제들 역시 몇몇은 북으로 넘어가버렸고, 연좌제에 묶여 그의 집안은 더는 날개를 펼 수 없었다. 현재 그에게 남은 유족은 딸 이옥비 여사. 직접 기름질 ‘옥(沃)’자와 아닐 ‘비(非)’자라는 이름을 지었다. 어지러운 시대에 기름지지 않게 욕심 없이 사는 삶, 부끄럽지 않도록 청렴한 삶. 이육사가 담은 마음의 뜻이기도 할 것이다. 몰락한 집안에서 이옥비 여사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뜻을 되새기며 견뎌왔다고 했다. 지금은 이육사문학관에서 아버지의 삶을 기리는 일을 돕고 있는 딸 이옥비 여사는 비교적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렸을 때 남들은 아버지가 시인이고 투사라서 부럽다고 했지만, 지게꾼이어도 좋으니 그저 옆에서 살아 있어주면 좋겠다고 아버지를 많이도 원망했어요.”


그녀의 덤덤함 속에 깔려있는 원망스러움의 일부는,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부채 중의 하나다. 누구나 ‘현재의 삶’에 대한 부채를 ‘과거’에 짐 지고 있다. 우리네 삶의 터전이 다름 아닌 바로 이곳이므로.


우리는 이제 ‘무엇을 꿈꾸고 바라며’ 다시 다가온 이 ‘시대’를 열어야 할까. 누군가의 피와 땀과 눈물이 스며들어 겨우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 이 ‘시대’. 

오래 전 시인이 꿈꿔오던- 태고적부터 존재해왔던 이 ‘광야’에 이제 우리가 부를 노래는 어떤 것인가. 다시는 부끄럽지 않을 노래의 깃발들이 이 땅 위로 무성히 뒤덮이기를. 부끄럽지 않을 5월이 되길 바라고 또 바란다.





이육사의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시집>*, 1946




* 1945년 해방된 조국에서 그의 시 <광야>와 <꽃>이 사후 발표되었으며, 1946년 동료시인 신석초 등이 그의 시를 엮어 유고시집인 <육사시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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